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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에 대한 개인적 추억

미완으로 남아 있는 2017년 1월 파타고니아 여행기 중에서.


2016년 7월, 스위스 제네바. 같이 출장 온 일행과 함께 코르나뱅 역 근처 어느 술집 겸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피자와 햄버거와 맥주를 팔고, 맞은편에 앉은 일행의 등 뒤로 당구대와 대형 TV 스크린이 놓인 종류의 집이었다. 일행 중 한 명은 나와 일 년째 같은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다른 한 명과는 그 날 회의 현장에서 처음 인사한 사이였다. 나는 조만간 오늘 처음 만난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직장 생활에 대한 격정적인 불만 토로가 시작될 줄 예감하지 못한 채, 거짓이 아니면서 적당히 힘들다는 인상을 주는 방향으로 내 업무의 고충이 뭔지 대답했다. 7월 말인데도 날씨가 한국의 10월 중순만큼 쌀쌀해 메뉴판의 뱅쇼가 끌렸지만,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그 대신 뭘 먹었는지 시간이 꽤 지난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 장면이 정확히 언제 TV에 나타났는지도 마찬가지다. 확실한 건 그걸 본 사람이 셋 중 나뿐이었다는 것이다.



TV 화면 가득 빙하가 보였다. 아무런 자막이나 내레이션이 없고, 화면 구석에 어떤 기관이나 단체 로고도 붙어 있지 않고, 흔한 배경음도 없었다. 거대한 하늘색 빙벽 일부가 햇살에 녹아 떨어져 나가는 모습과 그 때의 굉음만을 전하는 짧은 영상이었다. 영상이 끝나자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아르헨티나 관광청의 로고가 나타났다. 내가 방금 본 것이 아르헨티나 빙하 국립공원의 대표적 관광 명소인 페리토 모레노 빙하였음을 그제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내가 6개월 후에 볼 풍경, 지구 반대편으로 떠날 내 짧은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이미 찜했던 곳이었다. 스위스 TV에 단독 광고로 내보낼 정도의 존재감이 있는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빙하와 빙산이 뭔지 어렴풋하게 겨우 구별하는 수준이면서도, 나는 빙하를 보러 갈 거라는 말이 좋았다. 외국 여행을 몇 번 했지만 늘 도시만 방문했던 내게 빙하란 어떤 동화적 모험의 동의어, 다른 설명을 덧붙일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춘 마법적 선언으로 느껴졌다.


6개월이 지나, 사람들이 여행은 잘 다녀왔냐며 소감을 물어볼 때도 나는 페리토 모레노를 전면에 내세우게 될 것이다. 빙하를 봤지. 멋있었어. 그리고 빙하가 확실하게 나온 증거 사진도 몇 장 보여줄 것이다. 빙하 앞에 섰을 때가 사실 여행 중 최고의 순간은 아니었다고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것이다. 나빴다는 뜻은 아니다. 빙하를 본다는 건 빙하를 상상하는 것과 좀 다르더라는 걸 말로 잘 옮기지 못했다. 혀가 마비되도록 달콤한 아르헨티나 과자 알파호르를 주변에 기념품으로 돌리고, 사진을 보정해서 인화하고, 그걸 책갈피로 만들어 다시 주변에 돌리고, 다시 한 번 제네바에 갔다온 후인 지금에야 그 막연한 괴리감을 글로 표현해 볼 마음이 났다.



빙하를 본 날은 파타고니아 도착 셋째날이었다. 오전에 처음 빙하 앞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춥고 흐려 여행의 '클라이막스'를 망칠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유람선 투어 중에는 부슬비가 내려 새 카메라가 젖을까 봐 선실로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다행히 투어를 마치고 차로 이동해 전망 데크에 도착할 무렵 날이 조금 갰고 기온도 많이 올랐다. 열심히 걷다 보니 점점 체온이 올라 외투를 벗고 싶어졌는데, 예전부터 말썽이었던 지퍼가 안 내려가 벤치에 앉아 혼자 낑낑대게 됐다. 지친 몰골의(나는 거의 늘 그렇다) 외국인이 혼자 애쓰는 꼴이 안쓰러웠는지 근처에 있던 가족의 아버지가 도움을 자청했다. 여기까지 마테차 기구와 보온병을 챙겨왔고, 아버지와 딸이 리베르 플라테 유니폼을 맞춰입은 모습이 일부러 설정한 듯 아르헨티나적인 가족이었다. 지퍼를 내려 주는 쪽의 태도가 심상하기에 나도 민망하지 않은 척했지만, 민망했다. 

빙하 건너편 절벽에 위치한 관람 데크는 정상에서 시작해 표면을 따라 빙빙 돌며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였다. 산기슭이 빙하와 거의 평행선을 그리고 있어 아무리 많이 걸어도 빙하와 우리의 안전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빙하 위를 걸어 보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했는데, (어차피 적당한 복장도 아니었지만) 전혀 허용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세 가지 산책로 중 가장 먼 코스를 선택했다. 보행로를 따라 내려가면 갈수록 빙하의 가장자리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여름 햇살을 받아 페리토 모레노 빙하의 특징인 하늘색 얼음 덩어리들은 계속 조금씩 녹고 있었다. 크게는 자동차만한 얼음 덩어리가 앞의 호수로 떨어지면서 굉음이 발생하기도 했다. 스위스의 TV 광고에서 들었던 그 소리였다. 그 순간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한 자리에 앉아만 있는 방문자도 있었다. 반면,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수십 킬로미터 밖 산기슭에서 우리가 있는 호수 앞까지 빙하가 내달려 온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날이 아침에 비해 많이 맑아졌지만 여전히 구름이 많았다. 데크 주변은 맑지만 빙하 안쪽은 깊은 구름에 덮여 있기도, 반대로 먼 산자락들만 눈부시게 밝기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저 끝은 어딘가 다른 곳, 우리가 아는 모든 곳 너머의 어딘가일 것 같다는 착각이 조금씩 들었다. 눈 앞의 날카로운 얼음 봉우리를 넘고, 차가운 공기로 폐를 씻어내며 저 하얀 공허를 가로지르다 보면 사라진 사람과 태어나지 않을 영혼들의 그림자가 얼핏 보일 것 같았다.



한여름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세계를 그리워해 찾아 헤맨 사람들의 여정이 끝나는 곳, 현실보다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하얀 환상이 우리의 햇볕과 만나는 지점으로 보였다. 아래로 내려가 자세히 살펴본 환상은 군데군데 회색 이물질이 섞인 푸르죽죽한 어금니 더미였다. 강의 유려함과 파도의 역동성, 폭포의 에너지 같은 것들이 모두 그 안에 얼어붙어 있었다. 우리는 관람 데크와 유람선과 선착장의 보호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관찰한 후, 셔틀버스 정류장이 있는 위로 돌아가 저 너머 아스라한 곳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볼 수 있었다. 저 너머의 햇빛도 여기와 같다는 게 여전히 조금 신기했다.


데크에서 내려온 나는 매점에 앉아 장소에 걸맞게 부실한 커피와 알파호르를 먹었다. 작은 스티로폼 컵에 엄지손가락 한 마디만한 얼음 서너 개 위로 뜨거운 커피를 부은 '아이스 커피'였다. 실컷 여유를 부리고 버스 시간에 맞춰 나오니 못 보던 게 눈에 띄었다. 주차장인 줄만 알았던 매점 아래 자갈밭에서 빙하 앞 호수로 접근하는 길이 있었다. 빙하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 조각들이 물 위를 떠돌았다. 그 중에서도 머리와 긴 목을 몸통 쪽으로 돌린 네스호 괴물을 연상시키는 거대한 얼음덩어리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탑승 시간이 오 분 정도밖에 남지 않았지만, 나는 사진 한 장이라도 찍어보겠다며 주저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평소엔 체력이 부실하다 보니 잘 하지 않는 짓이었다. 매점에서 더 빨리 나오지 않은 게 내심 후회되기는 했다. 그러나 여기가 지구 반대편이고, 나는 지하철이나 사무실이 아닌 반짝이는 빙하 조각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낭만적 인식이 훨씬 더 강력했다. 내가 떠나기 전에 모험이라 이름 붙이고 막연히 꿈꿨던 것도, 실은 그런 작은 설렘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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