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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을 9일간 혼자 여행한 이야기: 서론

*최종 수정일자: 2019/1/6



2018년 6월 17일, 인천발 마드리드행 KE913편 기내. 화장실 사용중 표시등이 방금 꺼졌다. 두 번째 기내영화를 일시정지하고, 어두운 복도를 가로질러 화장실에 들어간다. 대한항공 기내 화장실의 익숙한 구조와, 더 익숙한 거울 속 형체. 까만 면바지, 까만 후드집업, 얇은 까만색 니트티 차림의 여자. 어차피 혼자 가는 여행인데 비행기에서 누구 시선을 의식하겠냐며 화장은 생략했다. 장거리 비행에서는 편하고 따뜻한 게 최고라는 신념이 있긴 하지. 그래도 지금 이 꼴은 막 8박 9일 여행을 시작했다기보다는 지치고 아픈 쪽에 더 가까워 보인다. 실제로  아프니까. 역류성 식도염 약을 벌써 5일째 먹고 있는데, 아직도 뭘 먹을 때마다 속이 불편하다. 이번엔 왜 이렇게 오래 가는 걸까. 가서는 괜찮을까. 5일치 약이 있긴 하지만, 과연 8박 9일 동안 이걸로 충분할까.


반 년 전인 1월에 결정된 여행이었다. 당시 영국 생활 중이었던 친구와 같이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되도록 빨리 가고 싶어서 시점은 휴가철이라기엔 약간 이른 6월, 장소는 스페인으로 결정됐다. 내가 스페인을 특별히 좋아했던가? 글쎄, 남유럽에선 이탈리아를 가장 좋아했지. 당분간 다시 갈 생각은 없지만. 가본 적이 없나? 아니다. 이번으로 스페인 땅을 밟는 것은 세 번째다. 십년 전 대학생 배낭여행 때 들렀던 바르셀로나, 작년 아르헨티나 여행의 중간 기착지였던 마드리드. 그렇지만 친구는 상황이 다르다. 가장 가보고 싶었던 유럽 국가는 단연 스페인이고, 가장 가보고 싶었던 도시 탑3에 바르셀로나가 들어간다.


친구: 그리고 그라나다도 가보고 싶고... 하지만 스페인이면 다 괜찮음!

나: 근데 난 남부는 쫌 그래... 한국 사람 엄청 많을 거 같은데... 알잖아 나는 여행지에서 한국어 들리면 흥이 깨지는 거ㅠㅠㅠ

친구: 그럼 산세바스티안은 어때?

나: 음?


뜻밖의 제안이지만, 좋은 생각 같았다. 우리 둘 다 바스크 지방, 특히 근원 불명의 고대어라는 바스크어에 오래 전부터 얄팍하게나마 관심이 있었다. 산세바스티안은 그 바스크 지방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으로 손꼽히는, 프랑스 국경 근처의 관광 도시다. 한국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스페인 북부니 내 성향에도 맞다.


나: 그럴까? 괜찮은데?


당시 우리가 상상한 여행은 이런 형태였다. 친구는 영국에서, 나는 한국에서 각각 비행기를 타고 산세바스티안에서 만난다. 며칠 바다를 실컷 보고 미식의 고장이라는 바스크의 전통 음식을 체험한 후 바르셀로나로 이동, 출국편을 타고 각자 귀국한다.


우리 둘 다, 그 때는 정말 그렇게 될 줄 알았다. 내가 아무리 혼자 여행을 좋아한대도, 이번만큼은 아닐 줄 알았다.



살다 이런 우울한 맛도 오래간만이었던 저자극 기내식


'ㅁㅁ이(친구)가 못 가게 됐을 때 돈을 좀 손해보더라도 같이 취소할 걸 그랬나? 같이 가자고 내가 먼저 말해놓고 혼자 온 게 자꾸 마음에 걸리긴 했어...' 화장실을 나와 어두운 복도를 더듬더듬 걷는다. '컨디션도 계속 저조하고, 평소답지 않게 외로움도 심하고... 작년에 아르헨티나 갈 때랑 너무 다르잖아. 그 때는 이런 걸 두 번 탔는데도 이거보다 나았어.' 손은 계속 습관적으로 명치를 문지른다. '6월 말에 간다고 회사에 눈치도 엄청 보였는데... 업무대체자한테 폭탄 떨어지진 않겠지?'


비틀비틀 자리로 돌아와, 기내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눈 앞에서 색깔이 번쩍이고 이야기가 이어지면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조금 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억지로 잠을 청할 때, 화장실에 갈 때, 놀랍도록 맛없는 저자극식 기내식(식도염으로 인해 사전 신청)을 먹을 때면 의문은 어김없이 다시 고개를 든다.


'반년 동안 준비한 그 여행인데 왜 이렇게 가기 싫지?'


아무래도 식도염 때문에 예민해진 것 같다고 스스로를 달래려 해 본다. '식도염은 스트레스로 생기는 거니까 도착하면 신이 나서 괜찮아지겠지. 아르헨티나에서 얼마나 잘 다녔는데.' 이 여행은 과연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내 막연한 희망처럼, 현지에 도착해 낯선 세계에 뛰어들면 뭔가가 마법적으로 좋아질까?


미래야 어떻건, 이젠 늦었다. 비행기는 이미 마드리드 바라하스 공항을 향해 시속 900km로 순항 중이었다. 이 지루한 시간도 결국은 다 흘러, 나를 스페인에 데려다 놓을 것이다. 이 여행기는 그 때부터의 이야기다.


<일정>

6월 17일, 출국

6월 18일, 쿠엥카

6월 19일, 마드리드 말라사냐

6월 20일, 빌바오

6월 21일~6월 25일, 산세바스티안

6월 26일, 한국 도착

써 보니 비로소 알 것 같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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