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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의 쿠엥카를 다녀온 이야기

스페인을 9일간 혼자 여행한 이야기 1편
절벽 위의 쿠엥카 구시가지와 멀리 보이는 신시가지

오로지 바스크 지방에만 집중하고 싶었던 여행이지만, 어쩌다 보니 마드리드에 이틀을 체류하게 됐다. 여행의 시작인 월요일과 화요일이었다. 이틀 중 하루는 근교 도시를 여행하고, 하루는 숙소가 있는 말라사냐 구(barrio)를 구경하기로 했다. 둘 중 뭘 먼저 할지는 투어 업체가 정했다. 나는 쿠엥카를 갈 생각이었는데, 이 도시의 영어가이드 포함 당일치기 투어는 이틀 중 월요일에만 있었던 것이다.

마드리드 근교 당일치기의 투톱은 단연 톨레도와 세고비아다. 나는 두 곳 다 가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쿠엥카를 택했다. 톨레도와 세고비아는 일단 한국어가 안 들려야 한다는 조건에 걸릴 가능성이 있었고, 사진을 봐도 딱히 끌리지 않았다. 그 둘의 대안으로는 엘 에스코리알, 쿠엥카, 아랑후에스, (좀 멀지만) 살라망카 등이 있었다. 심지어 자연은 어떨까 싶어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국립공원도 후보에 넣었다.

구글에서 cuenca spain을 치면 나오는 사진 중 하나. 뭔가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가 좋았다.

그 중 최종적으로 쿠엥카를 택한 이유는 그래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니 덜 유명해도 기본은 있겠지...라는 짐작, 그리고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볼 수 있단 장점이었다. 다른 후보 도시들과 달리 쿠엥카는 절벽 위에 있어서 풍광이 독특했고, 차로 30~40분 거리에 '마법에 걸린 도시(Ciudad Encantada)'라는 기암 지형이 있었다. 당일치기 투어를 활용하면 하루에 자연과 도시 두 가지를 모두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쿠엥카가 영어권 관광객들 사이에서도 별로 유명하지 않은지 시내 상점에선 영어가 잘 안 통하더라는 후기도 투어를 선택할 이유로 작용했다. 내가 아는 스페인어 단어는 다섯 개 정도니까.


쿠엥카의 대표적 명소로 꼽히는 '매달린 집'. 내가 찍은 사진 중엔 괜찮은 게 없어 구글 검색으로 가져왔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쿠엥카에 관심이 생기신 분들을 위해 적자면, 마드리드에서 영어 가이드를 제공하는 쿠엥카 당일치기 투어 업체는 쿠엥카 투어(Cuenca Tour)사 외에 잘 없는 듯하다. 나는 두 곳을 찾았다고 생각해 한 곳을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이 업체는 쿠엥카 투어의 관광상품을 연결해 주고 커미션만 받아가는 곳이었다. 아침에 업체 사무실에 도착해 텅 빈 투어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이 사실을 몰랐다. 투어에 이렇게 사람이 없다니(20인승 버스인데 나 포함 넷) 큰일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버스가 어딘가에서 멈춰서더니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이 우르르 타는 게 아닌가. 쿠엥카 투어를 통해 직접 예약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몇천 원 더 내고 더 일찍 출발했는데 같은 가이드를 받는다는 게 억울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악마의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강의 모습

일단, 오늘의 일정은 다음과 같다.

출발(아침 9시)->휴게소->악마의 전망대->마법에 걸린 도시->점심(오후 4시)->쿠엥카 시내->저녁 8~9시경 마드리드 귀환.

쿠엥카는 정말로 스페인어권 사람들만 아는 장소인지, 대부분의 투어 참가자는 스페인어 사용자였다. 영어만 쓸 줄 아는 사람은 20여명 중 나를 포함해 둘뿐이었는데, 그나마 다른 한 명은 스페인어가 되는 동행이 있었다. 가이드인 마르타도 평소 영어 가이드를 자주 해본 듯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스페인어로 10마디를 설명한다면 영어는 3-4마디 정도로 축소되어 나온다는 느낌이었다(아르헨티나에 갔을 때 두 번 경험한 일일투어 가이드들은 모두 스페인어와 영어 설명 길이가 거의 동일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한다는 게 느껴지는 친절한 가이드였다. 


도시 쿠엥카는 동명의 군에 속해 있으며, 마드리드에서는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린다. 쿠엥카 군은 전국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축에 들 정도로 농업이 강세다. 덕분에 지하도로를 따라 마드리드에서 빠져나오자, 토스카나를 연상시키는 낮은 구릉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여기저기 올리브 나무와 농가가 보이는 평화로운 전원 풍경이 나타났다. 나는 전날 잠을 아주 잘 잔 편은 아니어서 버스에서 자주 졸았다. 그래도 점점이 붉은 꽃이 핀 아름다운 풍경을 놓칠 정도는 아니었다. 정말 예쁜데 왜 영어 가이드에는 저 꽃 이야기가 없는 거지? 질문 못 하기로 소문난 한국인 중에서도 질문을 못 하는 나지만, 이번만큼은 금기를 깼다.

나: 저기... 저 빨간 꽃들은 다 뭐야?

가이드: 양귀비야.

나: 오... 양귀비? 농부들이 기르는 거야?

가이드: 아니, 잡초야. 올해 비가 많이 와서 많이 피었어.

그 앞뒤로 마르타는 쿠엥카 군의 농업과 지리적 특징 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 줬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는 오로지 '양귀비래! 비가 많이 왔다고 저렇게 예쁘게 피다니! 여기 진짜 동화 같아! 6월에 오길 잘했어!'라는 생각뿐이었다. 이후 조금 더 보니 길가에는 양귀비 외에도 라벤더를 연상시키는 보라색 꽃, 흰 꽃 등이 피어 있었다. 얼른 버스에 내려서 꽃을 잔뜩 찍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하여, 휴게소부터 악마의 전망대(정확한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정자 형태의 돌 지형으로 지역 마녀들과 악마와 회합 장소라는 전설이 있다)까지 내 머릿속은 말 그대로 꽃밭이었다. 접사 기능을 활용해 실컷 꽃 사진을 찍으며 이국의 들꽃에 감탄했다. 나중에 여행 사진을 보여주고 다닐 때, 내 또래들은 대체로 양귀비가 이렇게 생긴 꽃이냐며 신기해한 반면 직장의 나이 드신 분은 "이거 한국에도 많아"라고 쿨하게 답하시더라. 그랬군요...몰랐습니다...


악마의 전망대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마법에 걸린 도시로 이동할 즈음, 한국에서부터 달고 온 병인 역류성 식도염 증상이 다시 조금씩 강해지기 시작했다. 뭔가가 걸리고 얹힌 느낌, 어깨와 목이 뻐근하고 불편한 증세, 그리고 전반적으로 기운이 없고 지친 느낌 등이다.

마법에 걸린 도시는 1시간 반 정도를 도보로 돌아봐야 하는 자연공원이다. 어쩔까 고민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안 보긴 아쉬웠다. 뭔가 대단한 게 있겠지, 사진을 보니 그럴싸하던데 실물로 보면 더 좋겠지라는 기대가 있었다.


모세의 기적이 일어난 바다가 돌로 굳어지면 이런 느낌이겠지... 싶었다.실제로 바다였던 땅이라 잘 찾아보면 작은 해양생물 화석들이 보인다.

음... 글쎄. 결론을 말하자면, 고생에 비해서는 실망스러웠다. 뙤약볕 아래에서 한시간 반 동안, 내가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할 수 없이 계속 가이드를 따라다니는 게 쉽지는 않았다. 사실 중간쯤에 다시 입구로 돌아가겠다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었는데, 지도를 보니 이제 반쯤 온데다 혼자 돌아갈 길을 찾는 것도 일일 것 같아 포기했다. 


돌의 바다.

그래도 마법에 걸린 도시의 핵심인 침식된 암석들은 흥미로웠다. 식물에 양분을 빼앗겨 서서히 침식되는 돌이라든가, 조개 화석이 남아 있는 옛 해저 지형 등등...십몇년만에 다시 과학 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미학보다는 교육적 의의가 더 큰 느낌이니, 마드리드나 인근 도시 학교에서 한 번쯤 수학여행이나 소풍으로 올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주차장에도 수학여행인 듯한 단체 버스가 보였다.


보호색이 뛰어난 도마뱀도 만났다

마법에 걸린 도시에서 마르타의 스페인어:영어 가이드 비율은 10:4에서 10:2 정도로 줄어들었다. 과학적인 내용이 많아 난이도도 높아졌을 테고, 나나 다른 동양인 여자분이 가이드를 아주 열심히 듣는 타입이 아니기도 했고. 내 입장에서도 분량 많은 스페인어 설명을 못 알아들으니 흥미가 떨어지고, 기운은 점점 없고, 그렇다고 일행과 떨어질 수도 없으니 꽤 힘들었다. 

결국 무사히 완주는 했고, 거기에 대한 후회는 없다. 그러나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쿠엥카 투어에서 운영하는 다른 당일치기 상품인 대성당+쿠엥카 시 투어를 택한다거나, 돈키호테의 배경인 라만차(쿠엥카 군에 있다)와 연계된 다른 투어를 택하거나, 자유 여행을 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까 싶다. 결론적으로 마법에 걸린 도시가 일정에 들어가면서 쿠엥카 시 방문이 너무 짧아진 게 사실이니까.


이 여행 중 유일한 컨셉사진.


마법에 걸린 도시 투어가 끝난 다음은 점심 시간이었다.

쿠엥카 투어 사의 당일치기 투어는 점심으로 세가지 옵션을 제공한다. 점심 불포함, 간단한 식사(샌드위치와 과일 등), 지역풍 전통 점심식사. 나처럼 불포함을 고른 사람들을 쿠엥카 신시가지(관광은 구시가지)의 산 프란시스코라는 거리에 내려 준 후, 나머지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점심을 먹고 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불포함이 절대 나쁜 옵션은 아니었다. 투어측이 제공하는 간단한 식사 가격이 12유로 정도로, 현지 레스토랑에서 먹는 가격보다 더 비쌌거든.


점심 불포함들자들이 하차했던 쿠엥카 신시가지의 산프란시스코 가.

평소의 나였다면 최대한 멀리 돌아보며 조금이라도 더 좋아 보이는 집을 열심히 찾았겠지만, 나는 마법에 걸린 도시에서 힘을 많이 뺀 터라 '그냥 앉아서 뭐든 먹고' 싶었다. 눈 앞에 보이는 서너 개의 식당 중 한 곳을 골랐다. 야외 테이블에서 축구를 볼 수 있는 곳이었는데, 마침 한국 국대 경기가 끝나기 10분 전쯤이었다. 식도염은 어떻냐는 엄마의 안부 문자에 답하고, 메뉴판의 스페인어를 번역기에 돌려 가며 음식을 고르다 보니 어느새 축구는 끝나 있었다. 내가 평생 국대 축구에 별 관심이 없긴 했지만 혼자 해외에 나와서도 이 정도였군. 

한국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내가 가족을 보는 태도와 비슷하다. 특별한 자부심과 긍지의 근원이길 딱히 바라지 않고, 때로는 그런 시도에 적극적 거부감마저 느낀다. 어느 쪽이건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게 내 성정에도 맞고 옳은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뭘 하고 어떻게 살아도 떼어낼 수 없는, 내 근원의 일부에 대한 사랑. 그렇기 때문에 해외여행지를 고를 땐 늘 한국인이 없는 곳을 찾아다닌 것 같다. 한국어가 자주 들린다는 건 곧 나 자신을 자주 상기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내게 여행이란 원래의 나를 잠시 지우고 낯선 장소에서 내가 새롭게 태어났다는 착각을 즐기는 경험이었다. 쿠엥카에서 점심을 먹던 그 때까지, 이 전략은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토마토 수프/대구 스테이크토마토 수프/대구 스테이크

이 날 나는 토마토 수프와 대구 스테이크를 택했다(둘 다 맛은 괜찮았다). 소화가 잘 되는 액상과 흰살생선을 고르는 모습은 불과 3일 후 산세바스티안에서도 반복된다. 대구는 앞서 기내식에서도 한 번 먹었으므로, 똑같은 요리를 일주일에 세 번이나 먹은 셈이다. 내가 한국에서 대구탕을 평생 몇 번이나 먹었더라? 대구조림이라는 요리가 있긴 했나? 난 흰살생선 하면 그저 고등어와 삼치구이였는데. 아니면 뭐 광어회 같은 것들. 어쨌든, 3번을 먹으면서 뒤로 갈수록 점점 조리의 수준이 높아졌기에 결과적으로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리고 후식인 아이스크림. 이 식당이 서유럽 레스토랑 치고 저가(1인분에 약 10유로)임을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편안히 식사하며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카톡을 하니 좀 기운이 났다.


식사를 마친 후, 투어 버스는 대망의 쿠엥카 구시가비관광을 위해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길을 절반쯤 지나자, 거대한 암석의 파도 여러 겹이 산허리와 골짜기 사이로 불쑥 튀어나온 모습이 본격적으로... 내가 앉은 쪽과 반대편 버스 창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원래 저쪽 창가에 앉았는데 마르타가 영어 가이드 따로 해줄테니 자기 뒷자리로 오라고 했었지... 그 동안 마르타는 쿠엥카 시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스페인사 문외한인 내가 그나마 좀 아는 사건들이 언급돼 관심이 갔다. 스페인 내전 당시 쿠엥카가 강력한 반프랑코 도시였고, 그래서 훗날 프랑코가 도시를 '정화'하려고 쿠엥카가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거대한 예수상을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목적지인 바스크 지방도 프랑코라면 이를 가는 곳이었으니, 얼결에 진성 공화파 여행을 한 셈이다. 소싯적에 조지 오웰의 카탈로니아 찬가를 읽어보긴 했다만, 진짜 소싯적 일인데. 음.


도자기가 특산물이라고 한다

산 중턱의 광장에서 버스가 멈췄다. 왼쪽으로는 아까 반대편 창으로 보이던 산, 오른쪽으로는 쿠엥카가 보였다. 아직 너무 멀어서 도시의 최대 명물인 '매달린 집(hanging house)'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후 5시, 볕이 쨍쨍해 몇 분도 서있기 힘든 광장에 우리를 앉혀 놓은 채 마르타가 스페인어 설명을 다시 시작했다. 유달리 길었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모르겠군. 영어 버전이 걷다가 끊겼는데 나도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마르타는 정말 쿠엥카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이 글을 읽을 수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여하간, 기나긴 스페인어 설명이 끝난 후 마침내 우리 일행은 쿠엥카 구시가지에 입성했다. 안내책자나 소개글을 보면 쿠엥카 시내 사진으로 다채로운 색상으로 외벽을 마감한 건물 여러 채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많이 소개된다. 예쁘긴 하지만 밖에서 찍은 도시 전체의 전경이 누르스름한 톤인 것과는 분위기가 달라서 좀 의아했는데, 마르타를 따라 들어간 쿠엥카 구시가지 뒷골목은 도시 전경 사진에서 상상할 법한 모습 그대로였다. 질박하고 조금 금욕적으로 느껴지는, 흙색과 회색과 창백한 노란색. 

역시나 언덕 위의 중세도시인 이탈리아의 우르비노가 조금 떠올랐다. 10여년 전 우르비노를 방문할 때는 르네상스기의 도시국가로 어떤 가문이 통치했었으며 라파엘로의 고향이라는 등 기본적 정보를 알고 있었다. 반면, (영어 가이드를 이제 거의 포기한) 마르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내게 쿠엥카는 지금 이 곳에 있으면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일행을 따라 비탈길을 내려가면서, 나는 습관적으로 이 길을 나보다 앞서 걸었을 사람들을 상상했다. 거의 그림자에 가까운, 가장 모호한 이미지의 암살자와 수도자와 심부름꾼들이었다.


중앙의 약간 파리 노트르담스러운 건물이 대성당이다.

쿠엥카 안내책자의 사진들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마르타의 안내를 따라 내려온 길 끝에는 구시가지의 중심인 듯한 광장이 있었다. 프랑스 고딕 양식의 쿠엥카 대성당이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사진에서 봤던 그 빨갛고 파란 건물들이 서 있었다. 이 광장에서 30분 정도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가장 먼저 기념품점부터 들어갔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도자기가 유명하다는데, 전통 도자기 상점은 광장에 없는 듯했다. 날이 너무 더웠고 물도 거의 다 떨어졌으므로, 나는 타일 간판이 예쁜 눈 앞의 카페에 들어갔다.


카페 외부
내부 모습

자연스럽게 오래된 분위기와 (사진에선 잘 안 살지만) 창 밖으로 보이는 녹색 산자락이 근사해 단숨에 기분이 좋아졌다. 뭔가 주문을 해야 할텐데 밥 먹은지 얼마 안 됐고, 커피는 위장에 부담을 줄까봐 못 마시겠고, 메뉴판은 안 보이고. 나는 고민 끝에 탄산수 한 병을 주문했다. 나보다 먼저 들어온 우리 일행의 어느 노부부는 바 자리에서 카푸치노를 마셨지만, 나는 창가 근처에 앉았다. 그리고 좋다 싶은 데 왔으면 꼭 실시간으로 자랑래야 하는 SNS중독 현대인답게 정신없는 20분을 보냈다. 마시고, 구경하고, 찍고, 보정하고, 올리고, 다시 처음부터.


휴식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일정의 마지막이자 하이라이트인 산 파블로 다리의 차례가 왔다. 구시가지와 수도원을 잇는 다리다.


산 파블로 다리에서 수도원 방향으로 건널 때 왼쪽 풍경.

20세기에 만들었다고 하니 그렇게 오래 된 것은 아니다(원래 있던 것이 불타서 새로 지었다나). 처음 발을 내딛을 때는 별 두려움이 없고 주변 풍경에 신난 상태다가, 내 걸음에 따라 바닥 판자가 눌리는 기분이 느껴지자 살짝 겁이 났다. 놀이기구처럼 단단한 것에 붙잡혀 있다고 느끼면 몸이 몇 도로 뒤집어지고 솟구쳐도 별로 안 무섭고 재밌기만 한데, 발 딛을 데가 부실하거나 나를 받치는 구조물이 약하다는 생각은 무척 신경쓰인단 말이지. 그런데 이 정도 가지고 발이 떨리면 패러글라이딩(처음으로 해볼 예정이었다)은 잘 할 수 있으려나. 나는 아직 6일이나 남은 만큼 그 때 생각하기로 하고, 아쉬운 대로 폰카 사진을 찍었다. 그냥 찍었다는 것 이상의 의의는 없는 사진이지만... 그래도 그냥 지나갈 수 없으니 올려 본다.


수도원 방향 기준 오른쪽 풍경.

비록 제대로 된 사진은 남기지 못했지만, 여기에서 보는 풍경이 제일 아름다웠다. 마침내 쿠엥카의 대표적 건축물인 허공에 매달린 집이 제대로 보였다. 멀리서 보면 좀 많이 튀어나온 발코니 정도로 느껴지지만 말이다. 그보다는 절벽이 좋았다. 처음 버스에서 내려서 마르타의 설명을 들었던 산 위 광장부터 내가 방금 지나온 중심가 광장까지, 인간의 건축뿐이었다면 좀 심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슷한 색의 절벽, 깎이고 침식되고 그림자가 졌지만 아랍인들이 처음 이 도시를 세웠다는 7세기부터 여전히 도시를 머리에 이고 있는 절벽의 존재가 쿠엥카에 야성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했다. 시간의 힘인지, 마치 도시가 절벽에서 솟아난 것처럼 두 가지는 잘 어우러져 있었다. 예전에 시에나, 우르비노, 베르가모 등 이탈리아의 언덕 위 중세도시를 방문할 때는 밖에서 본 도시 전체의 풍경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었다. 반면 쿠엥카 구경은 돌아가는 다리 위에서, 내가 조금 전 지나쳐온 그 좁은 골목길과 너른 광장이 무엇의 일부였는지를 다리 위로 부는 상쾌한 계곡 바람을 맞으며 뒤돌아바라볼 때 완성된다는 느낌이었다. 고생은 좀 했지만 여기까지 오길 잘 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가벼웠다.


이게 현대미술관 입구다...!

투어 버스가 다리 반대편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그리고 다리가 좀 떨리기도 해서) 오래 끌 수 없었다. 나는 마법에 걸린 도시에서 고생한 것을 떠올리며, 차라리 쿠엥카 시내 관광에 집중해 허공에 매달린 집 중 한 곳을 가 보는 게 낫지 않나 생각했다. 두 곳은 현대미술관으로 개조됐고 한 곳은 식당인데, 우리 투어는 현대미술관을 입구 앞에 서서 설명만 들은 후 지나쳤다. 자유로운 예술을 억압하던 프랑코 시대에 세워졌다는 점도 의미 있고, 그토록 오래된 건물에 현대미술관을 세우겠다는 아이디어 자체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쉬웠다.

버스가 다시 출발했다. 저녁 7시, 해는 아직도 하늘 높이 떠 있었다. 다시 마이크를 잡은 마르타가 재밌으셨냐고, 쿠엥카는 관광객이 더 많이 필요하니 좋았다면 입소문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마지막 안내 멘트를 했다. 인맥 얇고 SNS 팔로워도 한줌뿐인 내가 그나마 도움이 될 길이 있다면 이런 글을 쓰는 것이겠지. 마르타의 말이 끝나고, 우리가 탄 차는 다시 나른한 구릉 사이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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