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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에서 힙한 카페를 찾아다닌 이야기

스페인을 9일간 혼자 여행한 이야기 2편.


서론, 1편 링크: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2130562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2150472


서론에서 썼듯 나는 마드리드가 초행이 아니었다. 프라도, 왕궁, 티센-보르네미스자 미술관, 시벨레스 광장과 솔 광장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마드리드의 축구장도 두 곳(산티아고 베르나베우와 지금은 AT가 떠났을 비센테 칼데론) 다 가본 것이다. 불과 1년 반 전의 일이다.

그래서 마드리드에 또 가게 되자, 이번에는 이 도시의 힙한 구역에 집중하기로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팔레르모 구(barrio)에 가 보고 알게 된 건데, 힙한 동네 방문에는 장점이 꽤 많았다. 흥미로운 가게가 많을 테니 기념품 사냥하기 좋고, 너무 격식차리지 않을 테니 캐주얼한 걸 선호하는 취향에도 맞고, 영어도 웬지 잘 통할 거 같고, 관광객 대상 범죄도 적을 것 같고 등등.


부에노스아이레스 팔레르모 구부에노스아이레스 팔레르모 구

약간의 구글 검색 결과, 마드리드의 힙한 동네는 말라사냐와 추에카인 듯했다. 나는 둘 중 치안이 낫다는 말라사냐로 숙소를 정했다. 6월 17일과 18일. 17일 저녁은 도착해서 짐을 풀어야 하니 별 일정이 없고, 18일에 쿠엥카 투어를 다녀온 후 19일에 말라사냐를 구경한다는 계획이었다. 이후 1 9일 밤 10시에 빌바오행 비행기를 타서, 밤 늦게 빌바오 숙소에 체크인할 예정이었다.


숙소 맞은편 골목의 그래피티

17일, 즉 도착 첫날에 잠깐 돌아본 말라사냐의 첫인상은 꽤 괜찮았다. 5.9유로에 간단한 요리 3종을 고를 수 있는 집이 두세 군데 있었는데, 한 군데에서 사 보니 양도 많고 맛있었다(후무스와 병아리콩 샐러드, 쌀 요리를 골랐었다). 서유럽 국가치고 너무 싸다, 한국 물가 진짜 너무하다며 기쁜 충격을 받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이후 다른 동네에서는 이런 은혜로운 컨셉과 가격의 식당을 찾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면서 정말 그런 집이 있었던가 나 스스로도 조금 안 믿길 정도.


이렇게까지 모여 있을 일인가...?이렇게까지 모여 있을 일인가...?

그 외에 가장 기억에 남는 모습이라면 5월 2일 광장(Plaza Dos de Mayo)에 바글바글 모여 있던 마드리드 시민들일 것이다. 말라사냐의 중심인 이 광장은 19세기 마드리드 시민들의 반나폴레옹 봉기를 기념해 이름이 붙었다. 인근에 다른 큰 광장이 딱히 없어선지, 명소니까 그런지, 다들 집에 들어기 싫었는지 저녁 8시의 광장은 정말... 사람으로... 바글바글했다. 앉을 데가 없어 바닥에 그냥 주저앉아 버린 사람들이 꽤 있었을 정도로. 게다가 사방이 막혀 있어서 그런지 말소리가 울렸다.

좀 이해가 안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드리드 사람들의 일상을 처음으로 보는 것 같아 재미있었다. 뭔가를 알아간다는 건 그 대상의 이상한 점도 알게 된다는 뜻이다. 첫인상은 별로 기억에 안 남았던 대상에 대해, 우연히 발견한 특이함을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될 때도 있다. 왕궁, 프라도, 솔 등 관광객 필수 코스를 찍을 때는 '한국어가 너무 자주 들리는 곳'일 뿐이던 마드리드가 이제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쿠엥카부터 다녀온 다음 내일모레에 이 동네를 열심히 돌아봐야지, 나는 기대감으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틀 후, 화요일. 

말라사냐를 구경하는 날이 시작됐다. 숙소 마지막 날이므로 체크아웃을 해야 했는데, 먼저 토마 카페(Toma Cafe)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날이 맑고, 좋아하는 옷인 린넨 재킷을 입어서 기분이 좋았다.


토마 카페의 외부 전경


입장해 보니 생각보다도 더 '힙스터 카페' 다웠다. 일단 의자가 불편하고, 의자보다 탁자가 더 낮은 자리도 있었다. 높은 테이블 회전율 유도가 요즘 카페들의 대세긴 하지. 흰색 베이스의 무채색 위주 인테리어 및 개방 천장(다행히 페인트칠은 꼼꼼하게 했더라)도 조국의 유행을 떠올리게 했으며, 두 점원은 모두 수염을 기른 젊은 백인 남성들이었다. 나는 커피 메뉴에서 코르타도를 고르고, 카운터 바로 옆에 놓인 파운드케이크를 같이주문했다.


카페 내부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외관과 맛 모두 너무나 평범한 내 케이크와 달리, 옆사람이 시킨 토스트는 일단 생긴 것부터가 근사했으니까. 옆사람 음식이라 사진을 찍을 순 없었지만, 토마토가 잔뜩 올라간 스페인식 토스트였다.


코르타도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생각보다 작아서 놀랐다. 한국 모 카페에서는 우유 좀 적은 라떼이름이 코르타도였고, 아르헨티나에서는... 내가 코르타도를 시켰던 적이 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군. 여하간 스페인의 코르타도란 에스프레소 마키아토 비슷한 거라는 걸 몰랐다. 역류성 식도염 환자에게 이건 너무 진하다는 걱정이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래도 4일만에 마시는 커피인지라, 내 손에 커피잔이 있다는 것 자체가 기뻤다. 술도 담배도 별다른 유흥도 안 하는 대신, 커피와 디저트가 삶의 낙인 사람에게 4일은 아주 긴 시간이었으니까.

스페인 카페는 한국처럼 몇 시간씩 죽치는 문화가 아닌 듯하지만, 그래도 토마에는 책이나 노트북을 들고 와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꽤 많았다. 나도 노트에 글을 적으며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힙스터 놀이를 할 때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하지만 코르타도는 역시 실수였다. 호텔로 돌아온 후, 짐을 싸던 중 갑자기 구역감이 느껴지고 가슴이 아팠다. 역류성 식도염 증상이었다. 호텔에선 이제 나가야 하는데 어쩌지. 오늘 밤 10시에 비행기편으로 빌바오 이동 예정이니 다음 숙소에 일찍 들어갈 수도 없다. 증상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체크아웃을 하고 거리로 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예쁜 복층구조 서점이 눈에 띄었다. 고양이가 상징인 듯한 곳이었는데(이것도 힙스터 같다고 해야 하나) 책은 스페인어라 언감생심이고, 선물용 에코백을 하나 샀다. 아마 15분 정도 걸렸을 것이다. 그런데 서점 밖으로 다시 나오니 이상하리만치 기운이 없었다. 당장 침대에 눕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앉아야 할 것 같았다.

이래선 거리 구경이 불가능하다. 어디든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어딜 가지? 트립어드바이저의 말라사냐 카페 순위를 출발 전에 정독하고, 구글지도를 출력해 정성스레 위치까지 표시해 놨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가까운 카페였던 토마는 방금 다녀왔다. 다른 곳들은 다 10분 이상 걸어야 한다. 그럴 자신이 없었다. 아무래도 그냥 당장 눈 앞의 카페에 들어가야겠다.


파르마시아의 바깥 모습

카페 파르마시아(Cafe Farmacia)는 이름에서 추정할 수 있듯 옛 약국을 개조한 카페다. 풍부한 색감의 빈티지한 외관이 첫날 저녁에 숙소 주변을 산책할 때부터 눈을 사로잡았지만,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사전 조사 때 못 본 이름이기도 하고, 겉이 예쁘면 내실은 없을 거라는 편견도 작렬했다(내 부실한 레이더에 안 잡혔었을 뿐, 이 카페의 구글 평점은 5점 만점에 4.0으로 꽤 높다).


하얀색 베이스지만 밝고 풍부한 느낌

일단 인테리어가 토마보다 훨씬 내 취향이었다. 오래된 건물을 개조한 카페는 한국에도 이제 심심찮게 보이지만, 그간 내가 가 본 곳은 어두컴컴하고 낡은 분위기거나 흰색 베이스면서 갈색으로 포인트를 주는 곳이 주조를 이뤘다. 그런데 외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고 내벽엔 밝은 노란색으로 액센트를 준 빈티지 카페라니, 내가 스페인에게 기대했던 새로움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파르마시아는 케이크와 커피, 아침식사 메뉴 등을 제공했다. 특히 케이크가 맛있어 보였다. 하지만 코르타도 한 잔에 위가 놀란 상황에서 이런 걸 시킬 순 없다. 나는 허브티 메뉴를 펴고, 역류한 위액처럼 씁쓸한 마음으로 루이보스를 시켰다. 카모마일과 페퍼민트, 과일 가향 등 싫어하는 향을 다 빼고 나니 거의 유일한 선택지였다. 한국에서는 사무실에 티백이 있으니까 가끔 먹는 정도였던 차다.


거의 완벽했던 내 자리

그 무난하고 친숙한 허브차를 마시며, 나는 조금씩 기운을 차렸다. 평일 낮답게 거리도, 카페도 한산했다. 거리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를 독차지하고 행인들을 관찰했다. 평소 워낙 잡생각이 많아서 '창 밖을 멍하니 보는' 게 잘 안 되는 편인데, 기운이 없으니까 그제야 정신이 비워진 것이다. 창살 때문인지 그림자 때문인지, 밖에선 내가 잘 보이지 않는 듯했다. 관광객 같은 차림의 행인들이 카페 안으로 들어올까 말까 고민하는 모습이 종종 보였다. 안에서 보면 들어오기 전의 나도 저런 모습이었을까? 난 후회하지 않는데, 저 사람들도 들어왔으면. 안타깝게도 내 텔레파시는 잘 전해지지 않았다.

달리 할 일이 없으니 노트에 좀 더 글을 쓰고, 책도 읽었다. 제인 오스틴의 <이성과 감성>이었다. 대학생 때 <오만과 편견>을 읽으며 왜 이 작가가 이렇게 유명한지 모르겠다고 툴툴댔더랬다. 오스틴이 평생 다룬 소재인 짝 찾기보다 훨씬 극적이거나 강렬한 스토리를 좋아하던 때다. 이제 생각해 보면 오스틴의 섬세함을 알아볼 눈도 없었던 것 같고. 이제 다시 읽어 보니 사람의 내면을 파고드는 솜씨와 너무 차갑지 않은 풍자가 인상적이라, 왜 오스틴이 그토록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 왔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오스틴을 읽던 중, 어디선가 자꾸 새소리가 들려 독서를 멈추기도 했다. 그리 넓지 않은 카페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새가 없는데, 소리는 아주 가까운 데에서 들리니 어리둥절했다. 내가 포기하고 딴짓을 할 동안에도 새소리는 꽤 오래, 계속 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출입구 바로 앞에 참새만한 크기의 갈색 새 두어 마리가 보였다. 사진기를 들고 허겁지겁 그 쪽으로 다가갔지만, 새들은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포로로 날아가 버렸다. 내가 터덜터덜 돌아오자 직원이 ¿Ha salido? 라고 웃으며 물었다. 날아갔냐는 뜻이겠지? 나는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으로 답했다.

어느 새 두 시간이 흘렀다. 이렇게 오래 있어도 괜찮은지 좀 신경쓰인 것만 빼면(그래서 나중에 추가 주문을 했다), 평온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상당히 오래간만에 찾아온, 어떤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진 순간이었다.


오후 2시, 원기를 약간 회복한 나는 카페에서 나와 본격적으로 말라사냐를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먼저 5월 2일 광장 방향으로 걸었다. 평일이 되니 훨씬 한산해서 동네 광장이라는 느낌이 더 잘 살아났다. 한쪽엔 학교가 있어서 학생들이 수업 받는 모습이 보이고, 벤치에는 유모차를 끌고 나온 어머니들이 앉아 있었다.


평일 낮, 5월 2일 광장

에멜무지로 거리를 걷다 보니 조금씩 이 동네의 특징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일단, 2018년답지 않게 서점이 많았다. 그래픽노블 서점, 그냥 서점, 내가 말은 모르지만 이건 독립출판이라는 느낌이 솔솔 나는 출판물이 많은 서점 등등 다양했다. 식당의 구성도 비교적 다양했다. 스시바는 물론, 스페인에서 막 뜨기 시작했다는 베트남 쌀국수집까지 하나 있었다.


카메라가 언제부턴가 이상해져서 수평을 수평으로 찍지 못하고 있다. 원래는 이렇게 볼록한 건물이 아닌데...

그보다 더 많지 않을까 싶었던 건 빈티지 의류점이다. 말라사냐 사람들은 빈티지를 좋아하기로 유명하다더니, 같은 길에 빈티지 옷집이 몇 개씩 있을 정도였다. 한 곳에서는 '남이 입던 구제 옷이 아닌 60년대 원피스 새 상품'도 팔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냥 흠... 정말 60년대적인걸... 이라고 얼치기 품평만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떻게 천이나 실이 전혀 삭거나 변색되는 일 없이 50년 이상 완전히 새것처럼 보존했는지 모르겠다. 


저 노란 의자에 앉아서 설정샷을 찍어도 예뻤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말라사냐와 (길을 잃어서 잠시 들어간) 추에카에는 개성 있게 꾸며진 가게들이 많았다. 빈티지 의류와 서점 외에도 화려한 타일로 벽을 장식한 오래된 식당부터 예쁜 아이스크림 가게, 리빙용품이나 잡화매장 등 종류가 다양해 취향에 맞는 가게를 찾는 재미가 있었다. 위장장애 때문에 나는 건너뛰었지만, 먹거리 면에서도 재미있는 곳이었라고 생각한다. 산 일데폰소 시장(Mercado de San Ildefonso)이나 바르셀로 시장(Mercado de Barcelo)를 돌아다녀도 되고, 타파스 바를 가거나 첫날 저녁의 나처럼 가성비 좋은 테이크아웃 식당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어슬렁대며 파르마시아에서 충전된 에너지를 소진한 나는 다음 장소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번 목적지 또한 카페였다. 트립어드바이저 말라사냐 카페 평점 1위에 빛나는 카페 데 라 루스(Cafe de la Luz).

인테리어는 로맨틱함이 가미된 약간의 빈티지로, 요즘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스타일이었다. 내 눈에는 로맨틱 빈티지만 놓고 본다면 숙소 바로 앞에 있었던 롤리나 빈티지 카페(Lolina Vintage Cafe)의 핑크색 벽을 베이스로 구성된 분위기가 더 예뻤던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의자와 와이파이, 휴식이 있으니 됐다. 게다가 음식도 맛있는 곳이랬지. 배가 약간 고프긴 한데 뭘 시켜야 할지 잘 몰랐던 나는 일단 더우니까 탄산수, 그리고 (기름진 것보단 낫겟지 싶어) 샐러드를 시켰다. 샐러드는 스페인 식당들이 늘 그렇듯 양이 많았고, 올리브와 토마토가 신선했다. 가게 안이 좀 더워서 뜨거운 건 시키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샐러드를 먹는 중 에어콘 가동이 시작됐다. 찬 음식과 찬 음료를 섭취 중이고, 식도염 때문에 원래도 부족한 체온유지 능력이 더욱 저하된 상태다. 이 상황에서 에어콘이 돌아가자 내장 안팎으로 이중의 싸늘함이 느껴졌다. 있는 옷을 다 껴입었으나 역부족이었다. 휴식이 절실한 타이밍인데 이래선 앉아 쉬는 게 아니라, 체온 유지를 위해 끙끙대는 꼴이 된다. 어떻게든 몸을 데워야지 싶어서 또 루이보스를 시켰다. 흥미롭게도 티백과 티팟이 같이 나왔다(티백이란 게 애당초 찻주전자니 거름망이니 하는 게 귀찮아서 생긴 거 아니었나...?).

파르마시아에서와 달리, 이 루이보스는 아무 도움도 못 됐다. 가향된 바닐라향이 지나치게 달큰해서 몸을 달래기는커녕 구역감을 자극했다. 몇 모금 못 마셨으니 당연히 몸도 데워지지 않았다. 이러고 있을 바에야 차라리 섭씨 30도의 바깥이 낫지. 실망을 추스리고, 기운을 그러모아 밖으로 나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좋아하는 탄수화물이나 시킬걸...


이젠 어디로 가야 하나? 터덜터덜 걷다 보니 산 일데폰소 광장이 나타났다. 햇볕이 잘 드는 야외 벤치에 일단 앉았다.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실 한국에서 계획을 짤 때는 말라사냐에 반나절 정도만 쓰고, 나머지 시간은 레이나 소피아 미술 센터와 레티로 공원에서 보낼 생각이었다. 지금이라도 갈까? 시간도 좀 빠듯하고, 몸 상태도 받쳐 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시간을 알뜰히 쓰던 평소 여행 패턴에 아직 미련이 남아, 가는 법과 영업시간을 검색했다. 알고 보니 레이나 소피아는 화요일이 휴관일이었다. 갈까 말까 고민 안해도 되고 좋네. 실망이 아닌 안도감만 들었다.


벤치에서 일어난 나는 5월 2일 광장 쪽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기운 없는 사람치고는 가게 구경은 계속했다. 회사만 가면 시도때도 없이 간식을 먹고 싶어지는 가짜 식욕처럼, 뭔가를 '득템'하는 기쁨으로 체력적 아쉬움을 중화하고 싶었던 것 같다.

기대를 걸었던 것과 달리, 일반 상점에서는 별로 눈에 띄는 게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5월 2일 광장 근처에서 말라사냐 기념품점을 (세 번째로 간 이 때에야) 발견했다. 마드리드가 아니라 말라사냐 기념품점이 따로 있다니, 내 생각보다도 인지도가 높은 동네였나 보다. 크지 않은 가게에서 눈에 띄는 건 페미니즘이나 LGBT 문구가 새겨진 에코백, 스티커, 티셔츠 등 다양한 굿즈들이었다. 말라사냐에서 열렸던 LGBT 행사 이름이 적힌 것도 있었다. 옆의 추에카가 LGBT 구역인 거야 워낙 유명하지만, 말라사냐도 비슷한 성향인 줄은 몰랐다. 동네에 대한 친근감이 올라간 나는 친구의 부탁을 받아 페미니즘 에코백을, 내 몫으로는 말라사냐 티셔츠를 샀다. 까만 바탕에 반짝이는 핑크색 심장이 그려진 에코백이었는데... 아직 친구의 후기샷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 허름한 건물의 정체는? 방탈출 카페!

이제 손에 물건도 좀 들었으니, 뿌듯해진 마음이 식기 전에 마지막으로 따뜻한 액체를 마시면 좋은 끝이 될 것 같았다. 카페는 이제 갈 만큼 갔으니 뭔가 국물이 좋겠다. 이럴 때를 위한 '비상용'으로 베트남 쌀국수 집 이름을 외워 뒀지, 나는 망설임 없이 구글 지도를 켰다.

가게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복병이있었다. 당시는 오후 6시였다. 2~4시에 점심을 먹고 8~10시에 저녁을 먹는 스페인 문화에서, 이 시각은 보통 브레이크 타임이다. 믿었던 베트남 쌀국수집은 8시 이후에야 문을 연다고 적혀 있었다. 플랜 B로 생각했던 근처의 스시바, 미소시루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이 식당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뿐만이 아니라, 이제 보니 거리의 식당 중 최소 절반은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문을 연 데 중에 수프 파는 집이 없나? 나는 숙소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골목들이다. 피자집, 케이크집, 잡화점, <어제의 여자>라는 간판의 술집... 마침내, 큰길가의 르 뺑 쿼티디엥(벨기에계 빵집 체인)에서 오늘의 수프라는 메뉴를 발견했다. 만세.


문제의 (호박은 아니었고, 치즈?) 수프

오늘의 수프가 무슨 수프인지 따위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알아듣지도 못할 텐데, 수프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오래지 않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안심이 되는 비주얼의 수프가 도착했다. 아무런 의심 없이 한 입 떴다. 상당히 맛있는... 콜드 수프였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바깥 온도 30도잖아. 여름인데. 하하하.

다시 우울해진 나는 결국 수프를 반도 못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원이 맛이 없었냐고 묻길래, 영어와 손짓발짓을 동원해 배가 아프다고 답했다.


어느 새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이 왔다. 숙소에 맡겼던 캐리어를 찾아, 트리부날 역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아까보다 기운이 생겼는진 모르겠지만, 이역만리에서 꼭 완수해야 할 비행기 탑승 미션이 있으므로 더 신경쓸 틈이 없다.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팔로 전해지는 가방 바퀴의 덜컹거림을 느끼며 열심히, 열심히 전진했다. 밤 10시 비행기고 비행 시간은 1시간이니까 빌바오 숙소 도착 예정시간은 빨라야 자정, 심하면 새벽 1시일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일정을 짠 내가 좀 원망스럽지만, 오늘처럼 내일도 어떻게든 넘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믿어보기로 했다. 완전히 틀린 생각이었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화에서.


트위터 @eida_tost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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