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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바오에서 아팠던 이야기

스페인을 9일간 혼자 여행한 이야기 3편.
빌바오 시의 상징 중 하나인 제프 쿤스의 'Puppy'.

서론, 1편 링크: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2130562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2150472


이 화는 시간 순서상 바스크 지방의 최대 도시인 빌바오를 방문한 기록에 해당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빌바오에 보낸 이틀간 있었던 일은 80%가 식도염이다. 이런 이야기를 원치 않는 분들은 건너뛰셔도 좋다. 빌바오에서 있었던 일은 물론이고, 이후 산세바스티안에서 약국을 찾아다닌 이야기까지 이 화에 몰아넣기로 하겠다.


역류성 식도염, 음, 내 여행을 망치러 온 내 지병. 딱히 안 낭만적인 이 병은 스페인 출국 1주일 전쯤에 걸렸다. 회사 근처 병원에서 약을 받았는데, 여행 중에도 4-5일은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양이었다. 이후 나는 카페인을 자제했고, 약을 거르지도 않았다. 한국에선 물론이고, 여행중에도 대체로 잘 챙겼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이번에는 유독 오랫동안 증세가 호전되지 않았다.

빌바오에 올 무렵, 나는 이 사실 자체가 당황스러웠다. 물론 돌이켜 보면 이유는 다 있었다. 밥먹고 나서 눕는 버릇, 소화가 잘 되는 음식을 찾아먹거나 긴장을 풀기 힘든 환경, 위장관 운동 조절제를 처방하지 않은 의사의 실수. 그리고 혼자 여행인만큼 모든 걸 스스로 챙겨야 하는 스트레스도 물론 한몫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면 빌바오에서 맞은 첫 아침에 이 모든 게 집약되어 있었다. 1. 아침식사가 멜론과 바게뜨였다. 바게뜨는 흰밥 버금가게 재료가 단순한 음식이니 한국에서 흔히 말하는 '소화에 방해되는 밀가루 음식'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내 식도가 받아들이기엔 좀 덩어리가 컸을 것이다. 2. 아침에 먹은 약은 지금까지 그랬듯 라베프라졸(제산제)와 모사프리드(소화제), 알긴산나트륨(위벽보호제)뿐이며 위장관 조절제가 없었다. 그리고 3. 아침식사 후 나는...아무 생각 없이... 똑바로 누워서 다시 잠들었다.


아침 사러 가는 길에 '바스크 도착 인증샷'으로 친구에게 보낸 사진. Aparkaldi Mugatua에 비하면 Estacionamiento Limitado는 거의 한국어로 느껴진다(?)

그 결과, 잠에서 깬 후 빌바오 최고의 명소인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을 보러 가려던 나는 가슴과 등이 아프고, 속이 쓰리고 타는 느낌 등 상당히 강력한 식도염 증상을 느꼈다. 브래지어를 차기 힘들 정도로 가슴~등이 아팠고, 독감 환자마냥 기운도 없었다. 구겐하임은 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였고, 날씨도 더없이 화창했다. 그러나 그 5분을 걸어 도착한 미술관 입구에서, 나는 입장권을 사는 대신 의자에 주저앉았다. 전시를 돌아보기는커녕 등 뒤의 기념품점에 들어갈 자신도 없었다. 평소 내가 얼마나 미술관 아트샵을 사랑했는지 생각해 볼 때 이는 확실한 적신호였다. 진짜 뭔가 문제가 있구나,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숙소로 복귀했다.

숙소에 들어와서 옷을 갈아입은 후, 기침이 연속되며 강한 구역감이 몰려들었다. 여기서 토하면 식도가 더 상할 것 같아 간신히 참았을 뿐이다. 이제야 절대 누우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아, 호스텔 10인실 안에 딱 하나 있는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내가 계속 독차지하니까 나중에 온 사람들은 이 의자가 내 거라고 생각하더라. 죄송...). 구역감이 잦아들면서, 오한과 함께 온갖 생각이 들었다. 약이 안 먹히는 것 같다, 이대로라면 그나마도 내일모레면 떨어지는데 남은 기간은 어떡하지, 혼자 온 게 이렇게 힘들긴 처음이다...

이런 불안과 걱정들은 서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어떤 제대로 된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심리적 지지가 필요했다. 트위터와 카톡을 켜고 해외에서 혼자 아픈 사람의 서러움을 호소했다. 친구들이라고 해도 별 뾰족한 수는 없었지만, 계속 사람이 드나드는 10인실 호스텔에서 예민해진 정신을 가라앉히고 마음이 조금 편안해지는 데에는 도움이 됐다.

그 다음으로는 뭔가 한눈팔 거리가 필요했다. 나는 일단 넷플릭스와 월드컵을 볼 수 있는 앱을 깔았다(공중파 방송사인 메디아셋 에스파냐에서 독점중계권을 따서, MiTele라는 무료 앱으로 시청이 가능했다). 딱히 축구를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기보단 뭔가를 생각없이 보고 싶었다. 언어를 몰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귀는 이어폰으로 틀어막고, 축구를 건성으로 보며 연습장에 아무 거나 낙서하며 이런저런 불편을 잊으려 했다.

그런 식으로 3시간을 버틴 끝에, 이만하면 좀 내려갔겠지 싶어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빌바오 구겐하임 입구 근처에서 찍은 사진.

3시간 정도 자고 나서 눈을 떴다. 아무래도 위장이 비면 몸 상태가 나아지는 모양이었다. 때는 오후 9시, 스페인의 월드컵 조별리그 경기가 한참 진행 중인 시각이었다. 사실 나는 과연 지역주의로 유명한 바스크 지역 사람들도 스페인 국가대표팀 경기를 열성적으로 응원할지 궁금했다. 웬만하면 동네 펍이라도 들러서 사람들이랑 같이 경기를 보면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한국에서의 야심찬 계획과 달리 그럴 기운은 없었다. 그냥 숙소 주변 식당 중에 내가 지금 갈 만한 데가 있는지 살짝 돌아보기로 했다. 안 먹을 순 없으니까.

여러 의미로, 별 것 없었다. 일단 주변의 식당은 대체로 느끼하거나 부담스러웠다(동양풍 식당은 일본 라멘집과 초밥집이 있었을 뿐이다). TV가 있는 식당에선 모두 자국의 월드컵 경기를 틀어놓고 있었지만, 식당 분위기에 따라 그냥 조용히 저녁을 먹는 모습도 꽤 눈에 띄었다. 스페인이라면 훨씬 정열적인 이미지인데. 역시 바스크 지방이라 그런가? 아니면 여기가 평범한 주택가라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숙소로 돌아온 나는 약을 다시 먹는 걸 깜빡한 채 잠들었다. 물론 큰 실수였다.


이 날은 워낙 찍은 사진이 없어서... 지난 화에서 안 올렸던 말라사냐 가게 사진을 끼워넣어 본다.

자정을 넘은 시각, 나는 갑작스런 가슴 통증과 두근거림에 잠이 깬다. 약빨이 떨어졌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약을 더 먹었지만, 효능이 나기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릴 터다. 게다가 약이 무사히 위에 도착할 때까지 앉아 있어야 하는데, 나 말고도 4명 정도가 같이 자는 10인실의 불을 켤 순 없었다. 다행히 24시간 운영하는 호스텔이라 로비 구역이 개방돼 있었다. 나는 불편한 의자에 앉아 (다행히 한국은 아침이었으므로) 다시 친구에게 징징대는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고 나니 생전 고려해 본 적 없었던 조기 귀국까지도 잠깐 끌렸다. 연가를 탈탈 털어 온 휴가에서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밖을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쌀쌀한 호스텔 로비에 혼자 앉아 있는 처지라니. 하필이면 스페인에서도 머나먼 바스크 지방을 고른 탓에 한식당이나 한국 식품점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도 한몫했다. 이게 무슨 꼴이람. 남은 휴가 동안 한국에서 죽이나 먹으며 하루종일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새벽이라 항공사에 전화할 길이 없었고, 내 예약 페이지엔 취소 버튼이 없었다. 밤이라 다행이었다. 낮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정말 얼결에 취소했을지도 모르니까. 


남은 말라사냐 사진(2)

써늘한 로비에 담요 한 장 없이 홀로 앉아,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오늘치 약은 다 먹었으니 이제 남은 약은 이틀치, 귀국까지는 아직 5일. 약이 더 필요한 건 확실한데, 이대로 똑같은 걸 계속 먹어야 하나? 한국에서 가져온 처방전은 라베프라졸, 모사프리드, 알긴산나트륨이었다. 그러고 보니 전에 식도염으로 약국에 가면 제산제랑 같이 위장관 조절제인 트리메부틴을 꼭 줬었다. 예전에 라베프라졸과 트리메부틴을 같이 처방 받았던 적도 있고. 그렇다면 지금 약에 트리메부틴까지 더해 볼까?

나는 전문가들의 말을 잘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이런 임의 처방을 꺼린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그런 행동을 권하지도 않고. 트리메부틴을 따로 가져왔지만 그 때까지 같이 안 먹은 이유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당시 나는 혼자 비영어권 국가를 여행 중이었으며, 영어가 되는 의사를 찾지 못한 상황이다(호스텔에 문의했지만 모른다고 했다). 더 이상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있는 약은 일단 다 먹어봐야지.

그리고 하나 더, 내일 최대한 빨리 산세바스티안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2층침대의 1층이라) 침대에 앉아 있을 수도 없고, 가방에 계속 자물쇠를 채워야 하는 등 호스텔이기에 겪어야 하는 불편에 진절머리가 났다. 아파도 호텔방 침대에서 아프고 싶었다. 병원이나 약국은 어차피 거기에도 다 있을 테고.

친구와 카톡하고, 산세바스티안 숙소에 병원 문의 메일을 보내는 등 이런저런 일을 처리하며 기나긴 2시간이 지났다. 식사가 아니고 알약이니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침실로 돌아가 자리에 누웠다. 새벽 세 시가 넘어서야 잠이 왔다.


지난 화에서 안 올렸던 말라사냐 사진(3)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아침 약부터 챙겨먹은 나는 근처 슈퍼에서 사온 인스턴트 수프와 남은 멜론으로 아주 조심스럽고 느린 아침을 먹었다. 다행히 전날보다는 상태가 나아졌다. 그러나 내심으론 그저 이 호스텔과 빌바오에서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어차피 버스로 한 시간 거리니, 정 아쉬워지면 날 잡아서 오면 되겠지. 그러나 지금은 떠나야겠다. 혼자만의 방, 바다, 며칠 후면 타오를 거라는 정화의 불꽃, 4박 5일 동안 아무 데로도 떠날 필요 없다는 안정감. 산세바스티안에 가면 괜찮을 거라고, 거긴 다를 거라고 믿기로 했다. 그런 게 필요했다.

도착 37시간만인 21일 열두시 정각, 나는 빌바오를 떠났다.



산세바에서 병원을 알아봤던 이야기

산세바스티안에 도착한 후 지역의 의료 시스템에 대해 나름대로 알아보았었다. 관광안내소와 호텔에 문의해 본 결과, 일단 공공보건소(Casa de Socorro)라는 연중무휴 1차 진료기관이 있었다. 내가 묵는 호텔에서는 먼저 이 공공보건소에 가 보는 쪽을 추천했다. 그러나 영어가 되는 의사가 얼마나 있을지 미지수고, 응급환자가 아닐 경우 며칠 대기해야 할 수도 있다고 한다. 진료비는(스-영 번역기에 의존해 읽은 몇 년 전 기사에 따르면) 비보험 환자의 경우 회당 90유로라고 하니 여행자보험 등이 없으면 부담스러울 수 있겠다. 

다행히, 나는 병원에 갈 필요가 없었다. 트리메부틴을 같이 먹기 시작한 이후로 상태가 조금씩 좋아졌던 것이다. 다만 양이 좀 모자라서, 현지 약국에서 더 사야 했다. 산세바스티안은 (내가 약국에 관심이 많아져서 잘 보이는 건가? 싶을 정도로) 약국이 여기저기 많은 도시였고, 번화가에는 24시간 약국도 가끔 있었다. 주말에 여는 약국 공지도 잘 되어 있었고.

식도염 치료제 4총사

두 번의 시도 끝에 4종을 모두 구할 수 있었다(모사프리드는 시니타프리다로 대체조제). 4종을 합해 약값은 30유로 정도 나왔는데, 대신 한국에서 사던 것보다 양이 많은 편이었다. 특히 트리메부틴은 한국 약국에서 사면 보통 10알 정도 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30알쯤 있었다. 음식만 그런 줄 알았더니 약 단위도 넉넉한 모양이다. 귀국은 물론이고 10일은 먹을 수 있는 양을 구하자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졌다. 우연의 일치지만, 도착 직후에는 내내 흐리던 산세바스티안의 날씨가 맑아진 것도 약을 사 온 무렵부터였다.


추신:

빌바오에 다시 가는 일은 없었다. 구경도 못 한 구도심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딱히 의욕이 없었다.

어쩐지 다시 안 올 것 같아서, 산세바스티안행 시외버스를 타기 전에 구겐하임(숙소에서 걸어서 5분 거리니까!) 기념품샵에 잠깐 들렀다. 바스크 문화에 대한 소개서(영어)를 한 권 샀고, 바스크와는 아무런 관계 없지만 흥미로운 책도 발견했다.


Atlas of Remote Islands: Fifty Islands I Have Never Set Foot On and Never Will, by Judith Schalansky 

원래 독일어 책이지만 구겐하임에는 스페인어판만 있었고, 나는 아마존에서 영문판을 주문했고, 최근 한국어판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가 평생 가 볼 일 없는 섬들을 배경으로 때로는 상상력을 펼치고, 때로는 믿겨지지 않는 실화를 전하는 낭만적 책이다. 관심 있는 분들이면 한 번쯤 살펴보시길.


트위터 @eida_tost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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