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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바스티안에서 매일 석양을 본 이야기 (1)

스페인을 9일간 혼자 여행한 이야기 4편 1화


서론, 1편 링크: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2130562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2150472


마리아 크리스티나 다리 옆, 지하 버스터미널에서 나와 처음 본 산세바스티안 시내를 떠올린다. 6월 21일 오후 1시 20분. 흐리고 바닷바람이 불어와 아까 떠나온 빌바오보다 선선했다. 우루메아 강 하구가 시내를 반으로 가르고 있었으므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물, 다리, 그리고 방파제용 테트라포드가 쌓인 둑 저편의 우아한 19세기풍 건물들이었다. 회색과 노르스름한 베이지색과 탁한 녹색. 프랑스 국경 근처여서인지, 어딘가 프랑스 느낌이 났다. 파리 세느강가를 약간 닮았군. 아니, 강이 있는 니스 같다. 


6개월 동안 기대했던 여행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이자 종착점에 드디어 도착했다. 6개월 전 처음 이 곳에 가기로 한 후 어쩐지 신이 나, 내가 좋아하는 미드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웨스트코비나 송 도입부를 따 흥얼거리기도 했었더랬지.도-노스티아, 기-푸스코아. 

(산세바스티안은 이 도시의 스페인어 이름, 도노스티아는 바스크 식 이름이다. 둘 다 도시의 수호성인인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뜻한다.)


숙소까지 캐리어를 끌고 덜컹덜컹 전진하며, 나는 도시의 이름을 마음 속으로 여러 번 반복했다. 산세바스티안, 도노스티아. 드디어 '진짜' 목적지에 왔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완벽하지 못한 첫인상에 대한 약간의 실망을 가라앉히려는 의도도 있었다. (출장이었지만) 파리에 갔다온 게 겨우 10개월 전이고, 딱히 프랑스 애호가는 아니니 '프랑스 느낌'이래서 특별히 들뜰 이유는 없었던 게다. 하지만 성급한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아 일단은 마음을 다독였다. 

최초의 불안은 숙소에 가까워지면서 잦아들었다. 숙소는 그로스(Gros)에 있었는데, 관광객이 많지 않은 지역이었다. 세계 어딜 가도 분위기가 비슷한 관광객용 기념품점 대신 바캉스 분위기가 묻어나는 예쁜 옷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늦게까지 영업하는 중국 식당이 있으니 식단 걱정도 덜었고, 딴 건 몰라도 최소한 쇼핑은 괜찮게 할 수 있겠네. 게다가 숙소는 예약사이트 평점이 높은 곳답게 깨끗하고 밝았다(이번 여행의 숙소 후기는 별도의 글로 소개할 예정). 3일만에 혼자만의 공간을 갖게 되자 그 동안 쌓였던 긴장이 좀 풀렸다.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온 산세바스티안 항공사진

산세바스티안은 세 해변의 도시다. 콘차, 온다레타, 수리올라. 그 중에서도 산세바스티안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해변은 중앙에 위치한 콘차다. 초승달 모양의 콘차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온다레타는 가족 단위로 오기 좋은 아담한 곳으로 홍보된다. 수리올라는 콘차와 우루메아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데, 파도가 센 편이라 서퍼들이 즐겨 찾는다. 수리올라가 있는 지역이 바로 내 숙소가 있는 그로스다.

<크레이지 엑스 걸프렌드>의 배경, 캘리포니아의 소도시 웨스트코비나는 해변까지 차로 두 시간(막히면 네 시간) 걸린다는 게 최대의 자랑이었다. 그런데 내 숙소는 구글에 의하면 해변에서 겨우, 고작,딱 십 분 거리다. 아무리 기운이 없대도 해변에 얼굴은 한 번 비추고 싶었다. 짐을 다 푼 후, 나는 동네도 돌아볼 겸 기장 가까운 수리올라로 걷기 시작했다.


수리올라, 첫인상

짙은 구름 아래에서 처음 본 수리올라는 썰렁하고 단조로웠다. 서퍼 몇 명, 백사장에 앉아 있는 사람 약간. 나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흐린 바다는 한국에도 많은걸.


츄러스는 안 파는 것 같았던 추레리아

그보다는 해변까지 가는 길에 있는 옷가게와 슈퍼, 과일가게들이 훨씬 끌렸다. 유럽에 가면 꼭 먹어 보라고 직장 동료가 추천했던 납작복숭아를 먹어 볼 기회였다. 좀 큰 귤만한 것 세 개를 골랐더니 가격이 고작 0.23유로였다(2.3유로인 줄 알고 당황했다가 너무 싸서 다시 놀랐다).한국에서는 비싼데다 다들 박스째로 팔아서 어쩌다 한 번 먹을 수 있는 과일인데, 여기선 1킬로당 1.13유로라니! 맛은 내가 복숭아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부드럽고 말랑한 백도였다. 이후 내가 1일 1복숭아를 실천하며 살게 된 것은 물론이다.


복숭아를 먹은 후, 나는 빌바오에서 원했던 대로 호텔에서 맘껏 휴식을 취했다. 도시의 첫인상이 평범했던데다, 어차피 앞으로 4일이나 더 있을 테니 도무지 급할 게 없었다. 나는 인스타를 업데이트한 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수리올라 주변에는 서핑샵이 여럿 있다


눈을 뜨니 어느덧 7시가 넘었다. 한국에서 미리 이날 8시 반으로 예약해 놓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됐지만 가격대비 뛰어난 음식으로 현지인 사이에서 인기'라는 소개글을 보고 충동적으로 했던 예약이다. 아무리 나홀로 여행이라지만, 미식의 고장에 온 이상 정찬을 한 번은 먹는 게 도리일 것 같기도 했고.

그렇게 예약한 식당의 이름은 라 파브리카(La Fabrica), 지향하는 스타일은 모던 바스크 요리였다. 소개글에 따르면 테이스팅 메뉴가 제일 대표적이라 해서, 예약할 땐 나도 당연히 그걸 먹게 될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당일이 되니, 기름진 스테이크나 파스타를 소화시킬 자신이 없었다. 식당까지 20분쯤 걷는 것도 약간 부담스러웠고. 취소하고 싶다는 생각이 슬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끼니 때 안 챙겨먹었다가 새벽에 배고프면 수가 없다는 것 정도는 알 만큼 여행을 다녔다. 게다가 지금은 새 도시에 도착한 첫날이다. 근처에 무슨 식당이 있는지 알아보려면 어차피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러느니 기왕에 예약한 좋은 곳을 가고 말지 싶었다. 결국 나는 홈페이지에 올라온 메뉴를 다시 살펴본 후, 수프와 생선 요리를 먹기로 하고 호텔을 나섰다.


라 파브리카는 산세바스티안의 구시가지(파르테 비에하, Parte Vieja)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가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로스의 숙소에서 산타 카탈리나 다리를 지난 후 거의 아무 길이나 골라 오른쪽으로 꺾으면 수마르디아(Zumardia) 대로가 나온다. 광화문 광장처럼 중앙이 공원처럼 꾸며진 이 길을 경계로 구시가지가 시작된다. 잘 자란 가로수들이 경계를 서고, 정자와 벤치 등이 설치된 수마르디아 대로 광장에서는 이 때 마침 재즈 연주가 한참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멜로디를 배경음악 삼아 구시가지의 운치 있는 좁은 거리로 접어드는 순간엔, 있지도 않은 사랑이 불현듯 그리워지는 달콤함이 있었다. 드디어 나타난 예의 기념품 가게들이나 앞에 가는 백인 중년 남성의 후줄근한 복장은 슬쩍 못 본 척, 새로운 세계에 들어설 때의 설렘을 동력 삼아 계속 걸었다.

8시 30분, 나는 막 저녁 영업을 시작한 라 파브리카에 도착했다. 자리에 안내받아 앉은 후, 작은 미러리스 카메라를 들고 혼자 나타난 내 모습이 어쩐지 잠행 중인 음식평론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마 식당 리뷰를 쓸 때 혼자 간 식당만 다루는 걸 원칙으로 한다는 모 평론가가 생각나서 그랬던 것 같다). 메뉴를 받고 예의상 뜸을 들였지만, 뭘 시킬지는 이미 정한 지 오래다. 수프와 대구, 그리고 바스크 지방의 가장 대표적인 디저트라는 치즈케이크. 셋 다 평소엔 내 돈 내고 거의 먹지 않았던 음식이지만, 현재의 최선임이 분명했다.


감자 크림, 바스크식 해산물 수프감자 크림, 바스크식 해산물 수프

다행히, 라 파브리카의 음식들은 평소 취향이 아닌 것이라도 맛있게 먹을 만했다. 먼저, 메뉴에 안 적혀 있었던 애피타이저는 소화불량자도 무난히 먹을 수 있는 감자 크림이었다.

두 번째로 나온 해산물 수프는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약간 당황한 상태였던 몸을 따뜻히 녹여 주었다. 적당량이 든 새우와 생선 살 건더기는 한결같이 씹는 맛이 살아 있었고, 어딘가 새롭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는 짭짤한 감칠맛에 자꾸 숟가락이 갔다. 폭풍우 치는 저녁 해안가의 작은 오두막에서 이런 수프를 끓여먹는 바스크인 어부 가족을 혼자 상상도 했다. 가장 기분 좋게 먹은 요리였다.


대구 스테이크, 바스크식 치즈케이크대구 스테이크, 바스크식 치즈케이크

메인 디쉬인 대구 스테이크는 내가 먹어본 흰생선 익힌 요리 중 제일 탱글했다. 소스 또한, 제대로묘사할 단어는 못 찾았지만, 한국식 생선찜의 '매운맛 혹은 단맛이 가미된 매운맛'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즉, 서양식 고급 생선 요리를 거의 먹어 본 적 없는 입장에서 무척 신선한 경험이었다. 며칠 전 쿠엥카에서 먹은 인생 첫 대구 스테이크도 괜찮았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새로운 식감은 분명 이 쪽이었다.

후식인 바스크식 치즈케이크 또한 윗부분이 살짝 캐러멜라이즈되어 크림 브륄레 같은 질감을 선사했고, 곁들인 새콤한 콩포트도 잘 어울렸다. 이런 좋은 치즈케이크를 만났는데 커피와 함께 먹을 수 없고(카페인 때문에 거절했다), 반은 억지로 남겨야 한다는 게 무척 안타까웠다.


라 파브리카 맞은편의 작은 골목

식사가 끝나니 9시 50분쯤이었다. 날이 쌀쌀하긴 했지만, 잘 만든 음식으로 배를 채우자 한결 기운이 났다. 구시가지의 분위기도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좁은 거리를 따라 여기저기 난 식당에서 따스하고 안온한 저녁 식사의 장면들이 엿보였다(제대로 찍은 사진이 없는 게 아쉽군). 나는 호텔로 돌아가는 대신, 눈 앞에 보이는 문을 향해 걸었다. 콘차 해변으로 가는 길이었다. 해 질 무렵이었지만 날이 너무 흐려 석양은 없었다.


콘차 해변은 4박 5일간 산세바스티안에 머물면서 매일 한 번씩은 지나쳤는데, 이 첫날 밤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같이 올 뻔했던 친구의 "그냥 누워만 있어도 좋다던데"라는 말 덕분에, 내 머릿속 콘차는 눈부신 햇살로 가득한 오후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이 때는 하늘이 서서히 청회색에서 남색으로 변하는 시간이다. 해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옅은 안개에 싸여 신비한 아우라를 풍기는 이겔도 산, 감추기 힘든 비밀을 감싼 듯 계속 조금씩 자리를 바꾸는 구름, 그리고 그 아래 처연한 파도였다. 반면 해안가를 따라 늘어선 건물들에서는 19세기 휴양지의 세련미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건물과 가로등에서 나오는 불빛이 해안선을 따라 늘어선 모습이 우아한 목걸이 같았다.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분위기가 충돌해, 조금 우울한 듯 섬세한 저녁 풍경을 만들었다.


보는 이를 고취시키보다는 차분히 가라앉히는 밤의 해변에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애썼다. 눈 앞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여행을 온 보람이 있다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면서도, 한편으론 약간 불안했다. 이 매력이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진 않는 것 같아서였다. 마치 어떤 완벽한 순간으로 지금까지의 투입과 노력이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처럼, 나는 눈 앞의 풍경에서 뭔가를 얻어내고 싶어했다. 추위와 약해진 위장, 외로움이 이런 감정을 부추겼던 것 같다. 이런 불안에 지나치게 이끌리면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는 게 어려워진다.


다행히 내겐 카메라가 있었다. 나는 누구의 소원인지 모를 글자들로 가득한 백사장을, 구름으로 주름진 감색 하늘을 사진에 담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시간이 지나 이 사진들의 도움을 받아 추억을 되살리게 될 때면, 아마 이 밤에 대해서도 좋은 부분들만 남게 될 것이라 믿었다. 지금까지 거의 그랬던 것처럼.



다음날 아침도 날은 흐렸다. 스페인 북부 지방은 맑은 날이 드물다는 말은 들었지만, 빌바오에서부터 따지면 어느 새 삼일 연속으로 해가 나지 않은 셈이었다. 그만큼 공기가 쌀쌀했다. 가져온 옷들을 겹겹이 껴입었는데도 뭔가 미덥지 않았다.

숙소 근처 약국에서 식도염 약을 더 사고, 다시 콘차 방향으로 나갔다.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계획을 짜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없었다. 어제 라 파브리카 가는 길에 봤던 유명 디저트집 오이아르춘(Oiartzun)의 디저트를 먹어보고 싶단 생각이 전부였다. 커피가 너무 그리우니 스타벅스의 디카페인도 한 잔 테이크아웃하기로 했다.

오이아르춘도, 스타벅스도 20분은 걸어야 하는 거리다(서로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아무 계획이 없는 사람답게, 중간에 그럴싸한 옷가게가 보이면 주저 없이 들어갔다. COS에서 시즌오프 세일하는 회색 가디건이 눈에 띄었다. 디자인도, 50% 세일가도 만족스러웠지만... 아무리 봐도 6월 말이 아니라 10월 말에 어울리는 소재였다. 나는 일단 당분을 좀 충전한 후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고 옷을 내려놓았다.


크림 패스트리 샌드, 오이아르춘 케이크, (토마토가 아니라) 바스크식 파이

야외에서 사진이 영 어설프게 찍혔지만, 맛은 확실히 있었던 오이아르춘의 쁘띠 갸또 세 점. 가격은 개당 1.2유로 정도로 기억한다. 왼쪽부터 차례로 크림 패스트리 샌드, 가게 이름을 따 이름붙인 삼각형 초콜렛 케이크, 속이 비어 있는게 특징인 바스크식 파이. 나는 패스트리 샌드가 가장 좋았다. 단순히 단맛과 바삭함의 조화이려니 했는데 아몬드로 추정되는 고소한 끝맛이 뜻밖의 강한 여운을 남겼던 것이다. 이후 산세바에서 서너 가지의 디저트를 더 시도해 봤으나, 이것만한 게 없길래 떠나는 날 오전에 다시 한 개를 사먹었다.


프티 갸또를 살 때만 해도, 이걸 먹으며 해안가 벤치에 앉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날씨가 문제였다. 당시의 기온은 약 20도로, 대부분이 얇은 긴팔 정도를 입었으며 반팔도 제법 보였다. 어쩐지 나만 혼자 보이지 않는 냉기 캡슐에 갇힌 기분이었다(실제론 식도염의 여파였지만). 아무래도 가만히 앉아 있긴 틀렸다. 몸을 움직여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뭘 하지?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분명 5개월 동안 틈틈이 가이드북도 읽었고, 웹서치도 여러 번 했고, 일별 일정도 소략하게나마 정했던 것 같은데. 물론 세부 일정을 짜지 않고, 그날그날 즉흥적으로 목적지를 정하는 게 내 평소 스타일이긴 하다. 그래도 둘쨋날 오전부터 이렇게 백짓장이 되긴 처음이었다.

다행히, 저 멀리에 콘차와 온다레타 해안을 가르는 경계라 할 수 있는 미라마르 궁이 보였다. 딱히 박물관도 뭣도 아니지만, 그래도 산세바스티안의 몇 안 되는 관광지니까 한번 가 보기로 했다. 스페인 왕가의 옛 별궁이라니 뭐라도 있겠지 뭐.


반쯤 걸었을 무렵부터 슬슬 후회가 시작됐다. 콘차의 산책로는 1km 정도인데, 평소의 나였다면 슬렁슬렁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는 즐거움에 별 문제를 못 느꼈을 거리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걷고 또 걸어도 해풍 때문에 몸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지금 생각해 보니, 몸이 다 안 나았다는 걸 어지간히 인정하기 싫었나 보다. 아프면 당연히 걸어도 힘이 안 나는 건데...). 흐린 하늘은 어제 저녁의 낭만이 꿈이었나 싶을 정도로 밋밋한 회색이었다. 주변을 세심하게 살펴보며 뭔가를 포착할 에너지가 부족한 만큼 자연히 사진도 잘 찍히지 않았다. 점점 포기하고 싶어졌지만, 주변에 버스정류장이 보이지 않았고 택시를 부를 줄도 몰랐다. 이미 꽤 와 버린 만큼 걸어서 돌아가는 것도 멀긴 마찬가지다. 결국 꾹 참고 계속 가는 편을 택했다. 마음 한켠으로 이 먼 데까지 와서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회의가 서서히 차오르고 있었다.


미라마르 궁

안타깝게도, 자신을 다독이며 겨우 도착한 목적지 미라마르 궁은 실망스러웠다. 잔디와 꽃을 심어 놓은 산책로가 깔끔하긴 하지만, 특별히 웅장하거나 인상적인 건축물은 아니었다. 내부에 들어갈 방법도 찾지 못했고(안에서 수업 같은 게 진행되는 모습이 보였다), 날이 흐리다 보니 여기에서 보이는 바다 풍경도 별 매력이 없었다. 


사진을 열 장은 찍었을까? 나는 억지로 궁 주변을 한바퀴 다 돈 후, 버스를 타러 갔다. 목적지는 숙소가 아닌 COS 매장, 즉 아까 본 회색 가디건을 파는 가게였다. 뭔가에 실망했을 때 먹을 것이나 쇼핑 같은 즉각적 즐거움으로 대신 보상받으려는 본능이 깨어난 것이다.


문제의 가디건

사진으로도 느껴지겠지만, 울이 섞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6월 말에 안 어울리는 옷이다. 하지만, 현재 이 도시에서 가장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임이 틀림없는 내게는 섬유 혼방률을 알 수 없는 이 도톰한 촉감이 위로로 다가왔다. 이제 밤의 해변에 나가도 춥지 않을 거라고,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쇼핑백을 손에 들고,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다시 숙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오후 2시 반, 어느덧 스페인 사람들의 점심 시간이었다. 나는 숙소 근처 식당에서 적당히 끼니를 해결하고 때마침 시작하는 축구 경기를 보며 숙소에서 휴식을 취했다. 앞으로도 산세바스티안의 오후는 이런 식으로 보내게 될 터였다. 스페인 사람들도 요즘은 잘 안 지킨다는 시에스타를 하면서, 사무실이었다면 가장 생산성을 올려야 할 시간대를 안락한 프라이버시 속에서 보낼 수 있다는 것. 그 때는 당연한 것처럼 누렸지만, 이런 시간도 여행의 특권인 것 같다.

5시. 이제 축구 경기도, 그 다음에 늘 이어지는 4시 스포츠뉴스도 끝났다. 점심에 먹은 쿠바식 밥 요리도 무사히 위장에 안착한 것 같다. TV를 끄고 무심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창 밖의 세계에서 뭔가가 변했음을 눈치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힘차게 걷었다. 하늘이 푸른 색이었다. 드디어 날이 갠 것이다.

트위터 @eida_tostada


산세바스티안의 이름 모를 분홍 가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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