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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세바스티안에서 매일 석양을 본 이야기 (2)

스페인을 9일간 혼자 여행한 이야기 4편 2화

서론, 1편 링크: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2130562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2150472


(이전 화에서 이어집니다)

드디어 해가 났다, 나도 모르게 소리내어 외쳤다. 도시의 대기에서 싸늘함과 우울을 걷어 내고, 내 미숙한 사진의 자연 필터가 될 소중한 해였다. 갑자기 온 몸에 생기가 돌았다. 더 이상 숙소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생각할 것도 계획할 것도 없다, 바다에 다시 가야 한다. 나는 5일간 캐리어 바닥에 모셔 놨던 만 원짜리 돗자리를 꺼내고, 기분 전환차 새 가디건을 입었다.

좀 두꺼울 수야 있겠지만, 새 가디건의 밝은 회색과 선명한 오렌지색이 내가 가져온 옷들보다 훨씬 스페인에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내가 요즘 자주 하는 말:"자라 가면 엄청 많은 컬러풀한 옷들 누가 입나 했더니 거기 사람들이 다 입더라"). 장소와 분위기에 어울리면서도 실용적이고 나를 잘 표현하는 옷을 입었다는 생각은 언제나 힘이 되고 자신감을 북돋운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내친 김에 지긋지긋한 검은 숄더백도 잠시 넣어두고, 마드리드 토마 카페에서 산 Warriors love coffee 에코백을 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사장에 가는 사람답게, 선글라스. 얼마만인지 모를 착장 셀카를 찍고, 숙소를 나설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된 기분마저 들었다. 목적지는 가장 가까운 수리올라 해변이었다.



나처럼 뛰쳐나온 사람이 좀 있었는지, 수리올라는어제보다 확연히 사람이 많았다. 어제 그곳과 같은 해안이라는 걸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콘차는 중앙에 위치한 산타클라라 섬과 늘 정박해 있는 요트들로 인해 시야가 조금 가려져 있다. 그에 비해 수리올라는 좀 더 단순하고 힘찬 인상이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아래 뚜렷한 수평선, 시원한 바람과 따끈한 토스트의 온도인 햇살. 멀리서 서퍼 여럿이 시원하게 부서지는 포말을 타고 물 위를 달렸다. 나는 서핑은커녕 자전거도 못 탈 정도로 각종 신체활동에 골고루 서툴지만,  큰 파도에 그들이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모습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게 좋았다. 그들처럼 온몸을 던지진 않더라도 가까이는 가야지. 파도에 다리를 적시며 킬킬 웃었다. 파도와의 물장난은 왜 그렇게 질리지 않는지. 적당히 시원한 물과 부드러운 모래의 감촉에 다리를 맡기고, 나를 향해 달려오는 파도들을 찍었다. 뒤돌아 보면 비슷비슷하지만, 그 안의 나는 한결같이 웃고 있는 사진들도.

이만하면 카메라는 좀 썼다 싶어지자, 나는 이번 여행에서 꼭 해보고 싶었던 일 한 가지를 실행하기로 한다. 해가 나자마자 수리올라로 달려...아니 빠르게 걸어온 가장 큰 이유다. 먼저, 모래사장으로 올라가 돗자리를 펴고 편하게 앉았다. 그리고 휴대전화의 오디오북 앱을 켰다. 이탈리아 작가 엘레나 페란테의 장편소설 <나의 빛나는 친구>가 들어 있었다. 점점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는 끈기를 잃어 가던 내게 정말 오랜만에 하루종일 책만 읽는 경험을 되돌려 준 책인데, 실물 책을 한국에 두고 와 오디오북으로 대체한 것이다. 나는 십대가 된 주인공 레누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혼자 해변에 가는 장면을 찾았다.


모래사장 위 내 작은 영역


<나의 눈부신 친구>는 일명 '나폴리 4부작'이라 불리는 페란테의 긴 시리즈 중 첫 권이다. 두 여주인공의 인생 전체를 다루는 이 작품에서 해변 장면은 초반부에 해당한다. 레누는 이 때 열일곱 살이며, 그 때까지 한 번도 자신이 태어난 동네 밖을 여행해 본 적 없다(어머니는 딸이 어릴 때 바다에 데려간 적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레누 자신은 기억이 없다).

하지만 막상 이스키아 섬에 도착한 후에도 처음엔 겁이 나 테라스 밖을 나가지 못한다. 며칠이 지나 레누를 귀여워하는 집 주인의 권유를 받자 그제사 용기를 내 수영복으로 갈아입는다. 마침내 바다에 들어온 레누는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을 뿐 어릴 때 정말로 수영을 배운 적이 있었음을 깨닫고, 오래지 않아 물을 즐기기 시작한다.

두 여주인공(레누와 그 친구 릴라)의 순탄치 않은 일생에서, 이 장면은 드물게 순수하고 소박한 평화가 가득한 순간이다. 나이가 들수록 느끼기 어려워지는, 시작과 발견과 탐색과 적응의 순수한 즐거움이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장면을 나중에 반드시 다시 읽어야겠다고, 그것도 아무데서가 아니라 스페인의 바닷가에서 읽어야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나 마침내 그 때가 왔다. 레누는 이스키아의 마론티 해변에, 나는 산세바스티안의 수리올라 해변에. 잠깐만, 마론티?


<나의 눈부신 친구>는 요즘 내가 여기저기에 추천하고 다니는 책이니만큼, 내용 누설은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 이 책의 다음 권인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에서 마론티가 어떤 사건의 배경으로 다시 등장하며, 이 사건이 그리 밝은 것이 아니라고만 말해야겠다. 사실 1권의 바다 장면을 처음 접할 때 나는 이스키아 섬이라는 큰 배경만 기억했지, 해변 이름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2권에서 '그 사건'이 발생한 해변이 이 장면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해변이라는 걸 인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2권과 그 이후의 사건을 떠올리며, 씁쓸함과 숙연함이 섞인 기분으로 해변 장면을 들었다. 결말을 마친 지 몇 주만에 다시 만난 1권 당시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젊고 희망이 넘쳤다. 훗날 가장 초라한 최후를 맞을 이들도 이 시점에서는 아직 미래가 많이 남아 있었다.

영영 잃어버린 애장품을 찍은 사진처럼, 그 다음에 일어날 일들로 인해 아름다움이 배가되어 버린 추억들이 있다. 그런 추억 속에서 우리는 미래의 불길한 구름이 어느 방향에서 다가오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렇기에 원한다면 특정한 관점을 택해 영영 풍경을 고정시켜 버릴 수도 있다. 그렇게 마음 속에 붙박힌 추억은 상당한 힘을 지닐 수 있지만, 그 힘의 방향성은 어디까지나 추억의 소유자인 개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 같다. <나의 눈부신 친구> 속 등장인물들의 인생은 이후 각자의 본능과 성정과 한계를 따라 온갖 방향으로 흘렀다.  마찬가지로 기억 속 아름다운 순간들은 우리를 살리지도, 죽이지도 않는 것 같다. 설령 그렇게 믿고 싶다 하더라도.

오디오북을 어느 정도 들은 후, 나는 생각의 방향도 좀 전환할 겸 음악 앱을 켰다. 어쩌다 보니 내 머릿속에서 산세바스티안 테마곡으로 미리 정해진 노래가 있었다. 익숙한 곡을 반복해 들으며 생각을 비우자 점차 정신이 지금 이 곳으로 돌아왔다. '꽤 오래 앉아 있었으니 이제 누워 볼까.'식사 후 3시간은 확실히 지났으니 이제 와 역류될 음식은 없겠지. 나는 조심스레 움직여 등을 바닥에 완전히 댔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늘 없는 모래사장에 누워본 적 없었다. 이유를 대려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두 핑계처럼 느껴졌다. 삼십년 넘게 살면서 한 번도 바닷가에 똑바로 누워 하늘을 본 적이 없었다니. 엄청 단순한 동작 아닌가? 그러고 보면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걸 놓치고 살았던 걸까? 살이 조금 타고 모래가 묻는 게 뭐 그리 두려웠을까.

하지만, 자신에 대한 불만이나 의구심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앞에서 쉽게 녹았다. '지금부터 하면 되지 뭐. 오늘의 이 깨달음을 시작으로, 나는 앞으로 가게 될 수많은 휴가에서 새로운 경험들을 하나하나 해 나갈 거야.' 누워서 보는 세상은 놀랍도록 단순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맑은 파란색이 가득했다. 나를 제외하면 가끔 스쳐 지나가는 갈매기 몇 마리가 이 세상의 전부 같았다. 음악 때문에 주변 피서객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더없이 밝고, 단순하고, 거대한 세계였다.

문득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져 카메라를 잡았더니, 어디에 초점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자꾸 오류를 냈다. 기껏 미러리스를 사 놓고 수동조작법을 안 배웠더니 이럴 때 곤란하군. 나는 구도를 약간 바꿔 끄트머리에 사물 한두 개를 우겨넣어 사진을 찍고(나중에 끝을 자르면 되니까!), 임기응변에 만족하며 카메라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이런 식으로 바다 냄새를 맡아 본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 날 수리올라를 떠난 시각은 8시 넘어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일몰 시각은 9시 52분이었다. 저녁을 먹은 후 콘차 해변에서 석양을 보면 딱 맞을 정도의 시간적 여유를 계산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첫 석양은 산세바스티안의 가장 대표적인 해변에서 맞아야 하지 않겠어? 같은 해안에서 오전에 힘들었던 기억은 이미 잊혀진 지 오래였다. 나는 스페인 사람들이 만든 태국식 볶음밥으로 배를 적당히 채운 후 다시 콘차를 향해 길을 나섰다.

정석적인 석양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날씨다 보니 하늘은 고르게 오렌지색이었고, 서향 해변이기에 해는 정중앙에서 내려앉았다. 선글라스를 가져오지 않아서 눈이 좀 피곤한 게 흠이었고, 요트가 많은 게 좀 시야에 걸리적거렸으며, 고백컨대 특별한 감동은 아니었다. 애국가 영상에서도 이런 석양을 봤던 것 같거든. 몇 년 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도 이런 식으로 석양에 실망했었는데, 그 때는 해가 지자마자 비행기 시간 때문에 해변을 떠나야 했었지.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급히 해야 할 일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해가 완전히 수평선 아래로 내려앉자, 나는 콘차와 구시가지를 잇는 알데르디 에데르 공원으로 올라갔다. 전날 저녁에 구름 낀 해변 모습을 처음으로 본 곳이다. 따뜻해진 날씨에 힘입어 모든 것이 전날보다 활기차고 부드러웠다. 여전히 쌀쌀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서쪽 하늘 끝이 점차 오렌지주스 색에서 많이 우린 홍차 색으로 변해 갈 동안, 수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광장을 산책했다. 그 동안 거리의 악사 두 사람이 <Somewhere over the Rainbow>를 연주했다. 나는 음악과 바다를 같이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동영상 기능을 켜고 바다를 찍었다. 그 동안 내 옆에 서 있던 커플이 갑자기 가볍고 경쾌한춤을 추기 시작했다. 반 바퀴 돌고, 발을 앞으로 차고, 얼굴에선 내내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았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으로 남기고 싶단 충동이 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사진을 위해 그렇게까지 해 본 적이 없어서 용기는 못 냈지만.

이름 모를 커플의 2인무가 끝난 후에도 악사들의 연주는 계속됐다. 다음 곡도 내가 아는 스탠다드 재즈 넘버였는데,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르 베네피끄 라벤더 차를 너무 오래 우릴 때처럼, 청보랏빛이 점점 진해진 끝에 남색으로 변하는 알데르디 에데르 공원은 홀로 여행자보다는 가족, 연인, 친구들을 훨씬 더 많이 잡아끌고 있었다. 자연스레 같이 오지 못한 친구가 떠올랐다. 친구라면 이 순간의 어떤 점에 주목했을지, 어떤 대화를 나눴을지, 함께일 때만 만들어지는 종류의 특별함이 더해졌을지 궁금했다. 이곳보다 7시간 빠르니, 서울은 아마 새벽 5시일 것이다. 친구가 꿈 속에서 이 풍경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한 이미지를 다 전달할 수 없다면, 이 청량한 보라색의 감각만이라도 느껴지길 소망했다.


비스케이 만으로 흘러드는 우루메아 강의 저녁

어느덧 열한시가 가까워졌다. 이번에는 (바다와 가장 가까운) 수리올라 다리를 따라 숙소로 돌아갔다. 바다와 맞닿은 하늘의 끄트머리는 불그스름한 기운이 아직도 조금 남아 있었다. 석양의 여운이 이렇게 길다는 걸 이제는 잊지 않을 것 같다. 앞으로도 이런 모습이 그리워 가끔 서쪽 바다를 찾겠지. 해의 흔적이 손톱만큼이라도 남아 있는 한 집에 들어갈 이유는 조금도 없다는 듯, 산세바스티안 사람들의 저녁식사도 계속되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목소리가 텅 빈 거리까지 울렸다.

숙소에 돌아온 나는 습관대로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내일은 산 후안 전야,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로 점지된 날이다. 이 날도 오늘 못지않게 날씨가 좋을 예정이었다.


트위터 @eida_tost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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