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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칼라파테의 서쪽, 밤하늘의 남쪽

미완으로 남아 있는 2017년 1월 파타고니아 여행기 중에서.
내가 묵었던 숙소 마당의 초저녁 모습

미완의 파타고니아 여행기 시리즈: 빙하에 대한 개인적 추억(먼저 보시는 편이 좋습니다)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1158863



페리토 모레노 빙하를 보고 온 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피곤에 지쳐 저녁 일곱시쯤 잠들었다. 파타고니아의 밤하늘이 멋있다는 말을 듣고 별이 보일 때까지 쭉 잘 생각이었는데, 뭔가 악몽을 꾼 끝에 아홉시 사십분쯤 깼다. 커튼 너머로 언뜻 보이는 하늘은 아직 해질녘의 색이었다. 내가 묵고 있었던 작은 도시, 엘칼라파테에서는 1월이면 밤 열 시까지도 해가 있으니까. 문득, 지금 나가서 서쪽 지평선이 보이는 곳을 찾기만 하면 석양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에서 서쪽 지평선이 보일지 아무런 답이 없었지만,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외투를 걸치고 휘적휘적 호스텔 밖으로 나갔다. 실내복에 외투만 대충 걸친 꼴이, 목에 건 미러리스 카메라만 아니었어도 집 앞 슈퍼에 나가는 모습이었다.

탁 트인 데에 가야 할 것 같아 니메스 습지 쪽으로 걷기 시작했지만, 볼 수 있다는 확신은 없었다. 도착한 첫날에 산 습지 입장이 일주일권이긴 했지만, 9시 40분에도 열리는지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빠른 걸음으로도 20분은 걸릴 텐데, 일몰은 이미 시작된 상황이었다. 아마 못 보겠지, 답은 이미 반쯤 나왔다. 그래도 잠에서 덜 깬 머리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니메스 습지. 오후 6-7시쯤 찍은 사진이다.

밤 10시를 앞둔 엘칼라파테의 중심 도로, 리베르타도르 가는 몇 시간 전 저녁을 먹을 때와 크게 다름없이 분주했다. 스페인어권 관습상 아직 한참 저녁을 먹을 시간대니 당연한 건데, 당시엔 이런 사실을 몰랐다. 주황색에서 남색으로 흐르는 하늘에 감싸여 행인들이 각각의 색을 잃고 일련의 실루엣으로 변할 동안, 그들의 소리와 공기에서 느껴지는 활기는 여전했다. 이 마을보다 훨씬 더 크고 오래되고 유명한 구대륙 도시들이 밤 여덟시면 문을 닫는 모습에 익숙했던 터라, 서울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런 점이 나를 더 안심시켰다. 이렇게 막 다녀도 괜찮을 거야. 여기는 내가 좋아하는 엘칼라파테니까. 오늘이 삼 일째지만 지금까지 다들 친절했어. 해가 지는 건 못 볼 것 같지만, 그래도 나는 계속 갈 거야.


조금 후 나를 쫄보라 판단하게 될 견공.


그 반쯤 취한 느낌은 그림처럼 예쁜 초록 벽과 노란 창 앞에 앉아 있던 비글 한 마리로 인해 깨졌다. 그 때까지 만난 엘 칼라파테의 개과 동물들은 생김새가 다양했으나 한결같이 순했고, 짖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다들 주인 없이 혼자 있는데도, 겁쟁이인 내가 별로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정도다.

하지만 얌전히 앉은 자기 모습 한 장을 찍은 데 만족하지 않고 자꾸 다가오는 게 싫었는지, 이 비글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컹컹 짖으며 내게 다가왔다. 드러난 이빨이 제법 사나웠다. 초등학생 시절 마당에서 길렀던 강아지 이후로 개를 가까이한 적 없는 나는 엉거주춤 길 반대편으로 도망쳤지만, 비글은 계속 뒤를 쫓아왔다. 뒤에서 걷던 여성들이 워워 하며 진정시키려는 동작을 취했다. 뭔가 상황이 벌어진다는 걸 인지한 주변의 다른 견공들까지 일제히 짖기 시작했다. 나는 더욱 당황했지만, 전속력으로 달리면 오히려 쫓아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계속 어정쩡하게 거리를 두었다. 결국 그냥 지나가는 쫄보다 싶어 안쓰러웠는지, 뒤에서 개를 진정시키려고 도와 준 여성들 덕분인지, 길모퉁이쯤에서 비글과 나의 추격전은 끝났다. 이제 잠기운은 이제 온데간데 없었다.

주변의 '강아지'들이 '개'로 보여 움찔하게 된 나는 방향을 틀어 다시 중심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그 와중에도 꽃 사진 같은 걸 한두 장 찍긴 했는데, 내가 아르헨티나에서 찍은 사진 중 아마 가장 지역색이 옅을 것이다). 어차피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어서 석양을 볼 확률은 이제 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저녁으로 먹은 커다란 샌드위치가 자는 사이에 다 소화된 상황이었던지라, 뭔가 먹을 걸 사는 데 만족하기로 했다.


저녁 10시까지 연다고 적힌 중심가의 대형 슈퍼마켓은 10시 10분에도 여전히 사람으로 가득했다. 여유 있게 골라도 될 것 같았지만, 통 입맛이 없었다. 뭘 먹을지 한참 몰라 헤매다가 그나마 고른 과자 하나도 결국 내려놓았다. 마감 때라서인지 계산 줄이 길었고, 이것 하나만으로는 아무래도 카드 결제가 안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슈퍼마켓을 나오면서는 그저 얼른 숙소로 돌아가고픈 생각뿐이었다. 나갈 때는 잠겨 있지 않았던 현관문을 열어 달라고 초인종을 세 번이나 눌렀다. 야간 리셉션을 담당하는 중년의 여직원이 문을 열어주면서 스페인어로 뭐라고 말했는데, 아마 한 번만 눌러도 된다는 뜻인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간 나는 문제의 비글 사진을 적당히 보정해 인스타그램에 올렸다. 잠은 완전히 깼고, 다시 자야 할 이유도 없다. 전혀 계획에 없었던 남십자성 사진을 찍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이번 여행을 위해 난생 처음으로 미러리스를 산 만큼 수동 촬영은 줌 돌리는 것밖에 모르는데다 삼각대도 없었다. 그래도 파타고니아에서의 마지막 밤을 뭔가 상징적으로 보낼 방법인 것 같았다. 나는 밤하늘 촬영법을 열심히 검색했다. 손떨림, 조리개 수동설정, 노출 시간 등 지금까지 인텔리전트 오토나 풍경촬영 모드에게 맡겨 놨던 전문 용어들이 우루루 쏟아져 나왔다. 

별을 보겠다고 다시 리셉셔니스트를 귀찮게 할 필요는 없었다. 호스텔 마당에서도 잘 보였으니까. 누가 봤다면 손떨림을 줄인답시고 셔터 한 번 누를 때마다 숨을 20초씩 참으며 남십자성을 찍어보겠다며 법석을 떠는 모습이 좀 웃기고 시끄러울 수도 있었을텐데, 다행히 우리 숙소의 유일한 반려동물인 말수 적은 검은 고양이 한 마리만이 가끔 내 근황을 확인했다.

초등학교 이후로 별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던 것을 갑자기 만회하려는 듯, 남반구 별자리를 검색해 이것저것 알아보려고 애썼다. 오리온자리의 허리띠 별을 알아보고 신이 나 펄쩍 뛰었다. 은하수도 희미하게나마 보였다. 사진은 당연히 쉽게 찍히지 않았다. 기술이 엉망진창이다 보니 대부분이 찍자마자 지워야 할 수준이었다. 그래도 호스텔 마당에서 남반구의 별을 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해, 멈출 생각이 없었다. 계속 조리개와 노출 수치를 조정하다 보면 뭐라도 나올 것 같았다. 한 시간이 넘게 용을 쓴 결과, 그럭저럭 별이 별처럼 보이는 사진이 마침내 두어 장 나왔다.


렌즈 플레어가 희미하게 있지만, 어쨌든 별이 보인다
남십자성 부분 확대

태어나서 처음으로 거북이 접기와 토끼봉투 접기에 성공했을 때처럼, 나는 뿌듯한 마음으로 이 사진들을 보고 또 보았다. 이제 파타고니아를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돌아갈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한 시간 더 비행기를 타고 저 별이 가리키는 남쪽으로, 이 대륙의 끝인 우수아이아로 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벌써 진해지기 시작한 아쉬움 속에서, 파타고니아의 청량한 밤이 점점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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