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산세바스티안에서 매일 석양을 본 이야기 (3)

스페인을 9일간 혼자 여행한 이야기 4편 3화

서론, 1편 링크: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2130562
https://eidawrites.postype.com/post/2150472

산 후안, 즉 세례 요한의 날은 6월 24일로 스페인어 문화권의 주요 축제 중 하나다. 그 전날 밤인 산 후안 전야가 되면 여러 가지 행사가 벌어진다. 사람들은 여기저기에 불을 피워 악한 기운을 내쫓고, 크고 작은 모닥불을 피우고, 때로는 불을 뛰어넘으며 영혼을 정화한다.

세례 요한의 이름을 달았지만, 이 행사의 기원은 고대 이교도의 제의라고 한다. 하긴, 정화라는 컨셉은 같다 해도 세례 요한은 물을 사용하니 이 축제와는 방법론적 차이가 크다. 예수 탄신일이 기독교 확대 과정에서 동지 축제와 결합되었듯, 예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났다는세례 요한의 탄생도 자연스레 하지와 결합된 모양이다. 

산 후안이 바스크 지방이나 산세바스티안 시의 대표적 명절은 아니다. 시 최대의 축제인 성 세바스티아누스 축일은 1월 20일이다. 여름 행사만 놓고 보더라도 7~9월에 열리는 재즈 페스티벌, 그레이트 위크, 영화제에 비해 산 후안은 비교적 소박해 보인다. 나 또한 처음부터 이 날을 목표했다기보다는, 6월 일정을 알아보다가 이 때 열리는 전통 행사가 있다길래 날짜를 맞췄을 뿐이다. 생일을 외국에서 보내는 것도 처음이고, 정화의 불꽃이라는 말도 좋았다. 게다가 바스크 전통문화 관련 행사도 개최된다니 이 지방에 대한 호기심을 조금이나마 충족시킬 기회였다.


마침내 찾아온 6월 23일 아침, 하늘은 세상의 모든 곰팡이를 말려 없앨 듯 맑고 화창했다. 여행자에게 뭘 해도 잘 풀릴 거라는 기대감을 주는 날씨였다. 뭘 해야 하지? 내가 아는 산 후안 전야 행사는 하나도 빠짐없이 저녁에 열릴 예정이었다. 낮 시간을 어떻게 쓰면 좋을까. 나는 높이 올라가고 싶었다. 한때 고려했던 패러글라이딩만큼은 아니라도, 어딘가 높은 데에서 이 도시를 보고 싶었다.


아이고 콘차에 사람 많은 것 좀 봐라!

산세바스티안의 세 해변 끄트머리에는 산봉우리가 셋 있다. 북쪽부터 차례로 수리올라 옆의 울리아 산, 수리올라와 콘차 사이의 우르굴 산, 온다레타 옆의 이겔도 산이다. 그 중에서 나는 성과 박물관이 있고 위치도 중간인(그래서 세 해변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는) 우르굴이 가장 끌렸다. 그러나 이 경우엔 산을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아직 체력에 자신이 없는데다, 밤까지 돌아다녀야 하는데 힘을 너무 빼고 싶지 않았다. 결국 강삭철도(푸니쿨라, Funicular)가 있어 오르막길 걱정이 없는 이겔도 산을 택했다.

시내는 지금까지의 어느 때보다도 활기찬 분위기였다. 수마르디아 대로에서는 여성 강사가 이십여 명의 일반인들에게 춤을 가르치고 있었고, 알데르디 에데르 광장에는 간이 놀이공원이 열렸다. 그물로 사면이 막힌 미니축구장 안에서 내 편도 네 편도 레알 소시에다드(산세바스티안의 프로축구팀) 유니폼 차림인 성인 남성들이 뻘뻘 뛰며 소리를 지를 동안, 아이들은 임시 구조물이 설치된 주황색 튜브 벽 사이를 뛰어다녔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콘차 해변은 산세바스티안에 이렇게 사람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꽉 차 있었다.


푸니쿨라르 창 밖으로 보이던 모습. 바스크 지방답게 침엽수가 많다

오늘의 목적지, 이겔도 산에 대해서는 한 가지 신경쓰이는 점이 있었다. 트립어드바이저의 이겔도 산 페이지에서는 산 정상의 촌스럽고 낡고 작은 놀이공원에 대한 불평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론리 플래닛에서도 비슷한 경고를 읽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테마파크에 간 게 언제인가 싶을 만큼 이런 쪽에 무관심하기도 하고, 어차피 경치가 목적인 만큼 그냥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정거장에 도착한 푸니쿨라

하지만 사전 검색이 없었대도, 푸니쿨라의 빈티지한 자태를 보고 누군가는 공원의 현실에 대해 짐작이 갔겠지. 푸니쿨라 승강장에서 당당하게 1등으로 빠져나온 나는, 눈 앞의 풍경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초라한 수로를 따라 초라한 나무보트가 승객도 없이 털털털 털털털 지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신비의...강...!

설마설마 했는데 이런 거였구만. 이 근사한 어트랙션의 이름은 '신비의 강(rio misterioso)'으로, 가격은 인당 2유로였다. 누군가가 탑승하는 모습을 볼 일이 있긴 할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뒤따라 온 다른 보트에 사람이 있었다.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강한 게 틀림없는 이 커플은 잠시 후 보트에서 내리며 "생각보다 재밌었어!"라고 (내가 알아들은 걸 보니 아마 영어로) 외쳤다. 그래도 딱히 타고 싶어지진 않았다.


범퍼카가 아니다, '우주 자동차'다...!!

이 놀이동산에는 신비의 강 외에도 범퍼카와 인형 사격장, 기념품점 등이 절찬리 영업 중이었다. 반면 귀신의 집은 귀신과 사람 중 어느 쪽이 이용 중인지 잘 알 수 없었으며, 워터슬라이드와 롤러코스터(추정)입구는 잠겨 있었다. 작고 낡고 한산한 놀이동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약 날이 흐리거나 춥거나 비가 왔다면 훨씬 우울해 보였을 것이다. 도시의 나이 든 사람들이 추억을 느끼면서도, 막상 아이들과 올 일이 생기면 할 게 너무 없다며 금세 질릴 장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방인이며, 이 날은 세상의 곰팡이를 모두 말려 없앨 듯 맑지 않았던가. 내 눈에 이 놀이동산은 누군가의 다락방에서 발견된 오래된 장난감 상자 같았다. 먼지가 군데군데 껴 있고 칠도 벗겨졌으며, 몇 개는 망가진 모양이지만 나는 나머지 기구들이 그럭저럭 작동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공원이 괜시리 살짝 대견했다. 


처음 볼 때는 귀신의 집 일부인 줄만 알았던 이겔도 탑(왼쪽 위)

이 놀이동산에는 뜻밖에도 진짜 유적이라 할 만한 게 하나 있다. 산세바스티안 시내에서 가장 높은 곳이며, 과거 경비대 초소였다는 이겔도 탑(Torreon de Igueldo)이다. 입장료는 2유로 정도였고, 탑 안에 엘리베이터는 없었다. 4~5층 높이에 불과하지만, 그동안 워낙 약골 여행자였던 만큼 체력적인 걱정이 안 들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어제까지에 비해 분명 몸이 가볍다. 여기까지 온 이상 이 정도는 해볼 수 있다. 집에선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귀찮지만 외국에서는 조금 더 못 가서 안달인, 평소의 내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이겔도 탑 창문 밖으로 보인 온다레타 해변

지난 세기에 찍은 흑백사진들이 걸려 있는 계단을 돌고 돌아, 큰 고생 없이 꼭대기에 올랐다. 동쪽으로는 산세바스티안 시내, 서쪽으로는 대서양. 멀리 하얀 요트 몇 대가 느릿느릿 물결을 갈랐다. 한때 유럽 제일의 포경꾼, 손꼽히는 선박 제조업자, 사나포선 선원이었던 사람들의 터전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평온한 바다였다.

탑 정상에서는 바로 옆에 위치한 머큐어 호텔의 로비와 수영장까지도 내려다보였다. 결혼식이 있는지 전통음악(으로 추정되는 아코디언 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정장을 갖춰입은 하객들이 호텔 입구 주변에 무리지어 서 있었다. 신랑신부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화려하고 풍성하다는 바스크 식 결혼식을 상상만 할 동안, 음악은 꽤 오래 이어졌다.


입장료라는 장애물 덕분에, 이 탑까지 올라오는 관광객은 드물었다. 카메라를 도둑맞을 걱정 없이 타이머 촬영으로 셀카 설정샷을 찍기 좋다는 뜻이다. 탁 트인 바다나 멀리 시내를 배경으로 뭔가 찍어보고 싶어 꽤 오래 낑낑댔지만, 사전 연습 부족은 치명적이었다. 카메라 각도도, 피사체 포즈도 어색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샀던 삼각대는 캐리어 밑바닥에 고이 잠들어 있었으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는 상당한 시행착오 끝에 패배를 인정하고 깨끗이 포기했다. 이 날의 경험을 바탕으로 셀프 설정샷 연습을 딱히... 할 것 같진 않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사진이 내 시야의 연장인 편이 익숙하다. 몇 장 잘 나온 사진이 있어주면 좋기야 하지만, 그걸 위해 들여야 할 노력이 지금의 내겐 너무 번거롭다.


푸니쿨라 승강장 앞 버스정류장

탑에서 내려오니 점심 시간이었다. 이겔도 탑 등정으로 몸 상태를 확신한 나는 오랫동안 미뤄졌던 '그 일'을 마침내 결행하기로 마음먹는다. 바로 바스크식 타파스인 핀초스(pintxos) 도전이었다. 이는 곧 괜찮은 바가 많이 있다는 구시가지를 향해 푸니쿨라를 타고, 버스를 타고,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뭐, 기운이 돌아왔는데 못 갈 것 있나. 그런데 푸니쿨라에서 내려 평지로 돌아오니,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들을 따라 오 분쯤 걸었을까, 산세바스티안의 세 번째 해변인 온다레타가 나타났다.


날이 좋은데다 토요일이다 보니, 백사장은 상당히 번잡했다. 기온은 27~29도, 남유럽의 초여름답게 습도가 낮아 사람의 진을 빼지 않는 잔잔한 더위였다. 잠깐이라도 물 근처에 가고 싶어 운동화를 벗고 푹푹 빠지는 흰 모래로 걸어들어갔다. 노르스름한 햇살에 대담하게 등을 내놓은 피서객들이 각자의 작은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해변도 참 이상한 곳이지, 전혀 사적이지 않은 장소에서 사적인 순간만큼만 몸을 가린 채 태연히 낮잠에 빠지는 게 자연스러운 곳이라니.

바다 근처까지 몇 발짝 모래사장을 걷다 보니, 피부가 붉게 달아오른 백인들 한복판에서 혼자 긴 청바지 차림인 게 뭔가 어색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뛰어들 만큼 물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분위기에 녹아들 준비물(수영복 등)도 전혀 없다. 여기에 오래 머무를 필요가 있을까. 나는 세 해변을 이제 모두 다 와봤다는 데 만족하며 온다레타를 떠났다. 처음이자 마지막 방문이었다.


온다레타 해변에서 나와 구시가지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 차도에서 갑자기 "아우파(Aupa)!"라는 함성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사이클 선수 몇 명이 보이기 시작했다. 산 후안과 관련된 행사인지는 몰라도, 사이클과 달리기 대회가 시내에서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바스크 사람들이 잘 하는 것 중 하나가 사이클이라더니,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경주 중인 선수들의 모습은 버스를 타고 콘차 해안을 따라 달릴 때도 다시 한 번 보였다. 오전과 다름없이 피서객으로 꽉 찬 콘차 해변, 선수들의 질주와 그들을 향해 외치는 바스크어 응원 구호, 버스 안으로 떨어지면서 모든 승객과 사물 위로 명확한 윤곽선을 드리우는 햇살.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만드는 메시지는 명확했다. 어제까지의 구름은 잊어도 좋다, 정말로 여름이 시작됐다는 선포였다.


버스에서 내린 후, 갓 시작된 여름의 에너지 속에서 나는 식당을 향해 구시가지 속을 여유롭게 걸었다. 급할 건 아무것도 없다. 그로스에선 전혀 안 보이던 기념품 상점들이 드디어 보이길래, 냉장고 자석과 엽서 등 여행지 기념품 컬렉션을 열심히 업데이트했다. 그 중 가장 특이하면서도 유용한 건 단연코 레알 소시에다드 모자였다. 그리 비싸지도 않았고(12유로 정도), 마침 하나 필요하기도 했고, 이거야말로 21세기 산세바스티안의 전통의상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오래 머물며 현지 문화를 깊이 있게 체험하진 못하더라도, 그들과 좀 더 가까워지고 싶다는 내 나름의 표현이었다.


선글라스를 빼면 모두 현지에서 산 것들

뭐, 지역 축구팀 모자 하나 썼다고 엄청난 변화가 생기진 않았다. 이틀 후 나를 공항까지 데려다 준 택시기사님이 좋아했던 정도. 오히려 출국 장소였던 바르셀로나 공항의 경찰이 너 소시에다드 모자 썼네? 하면서 훨씬 직설적으로 아는 척을 했다. 어쨌든 이 모자는 한국에서도 애용 중이다. 여기서야 이 엠블렘을 알아볼 사람이 드무니, 동네에서 쓰고 돌아다니다 보면 뭔가 비밀을 가진 기분이 들어 재미있다.

다시 6월 23일 오후, 산세바스티안 구시가지. 드디어, 오래도 미뤄졌던 핀초스 체험이 시작됐다. 그 새 핀초스 추천 식당 리스트를 잃어버려서 어찌저찌 결정된 목적지, 간다리아스 하테체아(Gandarias Jatetxea)는 인테리어부터 오래된 가게 분위기를 풍겼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과연, 사진으로만 보던 핀초스 접시들이 쫘르륵 놓여 있었다.


영어가 잘 통하고 친절한 인상의 종업원에게 흰 접시를 받았다. 이 접시에 먹고 싶은 걸 올려놓고 선결제한 후 먹으면 되는 모양이다. 뭔가 새로운 음식들이 잔뜩 올라가 있는 모습을 보니, '평소엔 잘 없는데 유독 식당에서만 발현되는' 내 호기심이 발동됐다. 나는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거나 맛이 짐작이 안 가는 음식 위주로 몇 개를 골랐다. 짜잔.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이미 한 달 이상 지난 일이다 보니, 사실 개개의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두 개 정도는 괜찮았고, 두 개는 그냥 외국 음식이라는 느낌이었고, 하나는 (아마도 왼쪽의 청어 핀초였던 것 같은데) 영 아니었다고밖에. 사진으로도 알 수 있듯 해산물을 여럿 골랐는데, 고르고 나서 보니 내가 비린내를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다. 사진 오른쪽 뒷편, 커다란 버섯이 세 개나 꼬치로 꿰인 핀초는 버섯의 간이 좀 더 됐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

나는 위장 상태를 생각해, 무리해서 다 먹지 않고 약간 남겼다. 뭔가 아쉽긴 하지만, 일단은 그렇게 궁금해하던 핀초를 먹어 봤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뒀다. 5개 가격이 10유로 정도라 식당에서 먹는 것치고 저렴하다는 것도 좋았다. 한국에서 한식이 그렇듯, 여기서도 제일 싼 건 전통 음식인 걸까. 오래되고 친숙한 음식일수록 가격 상승에 대한 반감이 큰 게 사람 마음이라 그런지.


구시가지의 어느 과일가게

숙소로 오면서, 생일을 기념할 겸 프렌치 바스크 스타일을 표방하는 인근 디저트집에서 보라초(borracho)라는 스페인 디저트를 샀다. 스폰지 케이크에 크림을 올린 형태로, 각각의 구성 요소들은 맛있었는데 케이크에 꿀을 꽂아야 맛있대서 수액 주사마냥 꽂았다가 그만 너무 달고 흥건해져 버렸다(나중에 찾아보니 이 디저트는 뭔가를 흥건하게 적시는 게 핵심이며, 보라초라는 단어도 취했다는 뜻이라 한다). 흠, 당 보충 하나는 확실하군. 저녁에 생명의 나무 의식을 보러 갈 때까지, 이제는 시에스타 시간이다.


트위터 @eida_tostada

써 보니 비로소 알 것 같은 이야기들

에이다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

SNS 계정으로 간편하게 로그인하고 댓글을 남겨주세요.